▲ 왼쪽부터 비의 <닌자 어쌔신>, 장동건의 <워리어스 웨이>, 이병헌의 <지 아이 조>. |
가수 겸 배우 비(본명 정지훈)는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 배우의 선구자 격이다. 2008년 영화 <스피드 레이서>에서 조연으로 출연해 워쇼스키 감독의 눈에 든 비는 이듬해 <닌자 어쌔신>의 주연을 맡았다. 당시 비는 “성공을 해야 아시아 배우에게 기회가 있겠지만 첫 술에 배부르겠냐고 생각한다. 하나의 도전일 것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닌자 어쌔신>은 극장 흥행과 DVD 수입을 합쳐 미국에서 7637만 7722달러(약 864억 6103만 원)를 거둬들였다. 충분히 배부를 만한 첫 술이었다.
배우 이병헌 역시 할리우드 영화 <지 아이 조>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합격점을 받았다. <지 아이 조>가 전 세계에서 거둬들인 흥행성적은 3억 달러가 넘는다. <닌자 어쌔신>의 성적을 훨씬 웃돈다.
하지만 한계점은 명확하다. 두 배우 모두 할리우드에서는 액션 배우로 기억된다. 지난해 <워리어스 웨이>로 할리우드를 공략한 장동건 역시 대사가 적은 액션 배우로 각인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병헌은 국내에서는 연기대상을 받은 만큼 뛰어난 연기를 인정받는 배우다. 장동건 역시 <친구>에서 탄탄한 연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연기력으로 승부할 수 없다.
이는 비단 한국인 배우들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대부분 아시아 남자 배우들이 겪는 딜레마다. 먼저 할리우드 진출을 타진한 성룡 이연걸 주윤발 등도 내면 연기보다 액션 연기로 승부했다. 한 외화직배사 관계자는 “동양인 남자 배우는 여자 배우에 비해 맡을 수 있는 캐릭터가 한정된다. 서양인들이 동양인 남자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탓이다. 때문에 인물 자체의 매력보다는 격한 액션 등 덩치가 큰 서양 배우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액션 연기가 가능한 배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워리어스 웨이>에는 장동건과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케이트 보스워스의 키스신이 담겼다. 당시 <워리어스 웨이>의 관계자는 “동양 남자 배우와 서양 여배우가 키스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여전히 할리우드에서는 동양인 남자와 백인 여성의 키스를 터부(taboo)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홍보를 위한 발언이었지만 그 속에는 동양인 배우를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이 담겨 있는 셈이다.
배우들의 움직임에 비해 충무로 감독들의 할리우드 진출은 아직 미미한 편이다. 중국의 오우삼, 인도의 M.나이트 샤말란, 프랑스의 뤽 베송 감독 등이 할리우드의 대작을 연출하며 자국과 할리우드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감안하면 아직 충무로의 갈 길은 멀다. 한 영화 관계자는 “영화 산업이 발달된 곳일수록 감독의 영향력이 크다. 할리우드를 비롯해 프랑스 인도 등에서는 작품을 판단할 때 배우보다 감독을 먼저 본다. 하지만 아직 충무로에서는 감독보다 유명 배우의 캐스팅을 먼저 살피는 경향이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은 배우와 제작사가 해외로 나가는 물꼬를 트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투자가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배우들과 스태프를 끌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할리우드는 대형 제작사와 배급사의 힘이 크다. 이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한국 감독 한 명만 있으면 수많은 한국 배우와 스태프가 훨씬 좋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칸의 남자’로 불리는 박찬욱 감독은 현재 이 영역에 가장 근접해 있다. 박 감독은 내년 개봉을 목표로 올 봄부터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의 촬영을 시작한다. 이 영화는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앤트워스 밀러가 시나리오를 쓰고, 할리우드의 명제작자이자 감독인 리들리 스콧-토니 스콧 형제가 프로듀싱을 맡는다. 최근에는 니콜 키드먼과 콜린 퍼스가 <스토커>의 출연 여부를 두고 제작사와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김지운 감독과 나홍진 감독이 할리우드를 노크하고 있다.
한국 감독들이 할리우드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대표작이 필요하다. ‘돈을 벌어주는 감독’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오우삼 감독은 96년 97년 연이어 만든 <브로큰 애로우>와 <페이스 오프>로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위상을 공고히 했다. 뤽 베송과 M.나이트 샤말란 역시 각각 <레옹>과 <식스센스>를 통해 깊이 각인됐다. 한 영화수입사 대표는 “감독도 배우도 우선 언어의 장벽을 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면 현지 스태프와 제대로 손발을 맞출 수 없다. 피부색이 다른 것은 실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의사 표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감독과 배우는 대우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 외국 제작사와 손잡은 합작 영화들이 할리우드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기 위해 일종의 ‘우회상장’을 택한 셈. 여러 제작사가 규합한 만큼 영화의 스케일도 커지고 배우들도 다채로워졌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속빈강정’으로 전락한 합작 영화도 적지 않다.
북미 박스오피스 집계사이트 모조에 따르면 장동건이 주연한 <워리어스 웨이>는 2010년 할리우드 박스오피스 145위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2일 미국서 개봉된 <워리어스 웨이>는 20일 동안 상영되며 839만 9136달러를 벌어들였다. 총제작비가 4200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손해가 막심하다. 국내 흥행 성적은 더욱 초라하다. 전국 관객 43만 명, 역대 장동건이 출연한 영화 중 최저 수준이다. 케이트 보스워스, 제프리 러시와 같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다는 사실이 무색하다.
2009년 개봉된 전지현 주연의 <블러드>의 흥행 성적은 더욱 참담하다. 일본 애니메니션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만화를 홍콩 프랑스 등이 합작해 영화화하면서 4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그러나 국내 관객은 고작 10만여 명. 미국에서는 소규모로 개봉됐다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할리우드 진출작이라고 하기가 민망한 수준. 한 영화 관계자는 “어설픈 도전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탄탄한 기획과 빈틈없는 준비가 필요하다. 날고 기는 영화 전문가들이 모이는 할리우드의 문턱이 높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먼저다”고 꼬집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