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8일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되고 있다. 유장훈 기자 |
2007년 대선을 앞두고 BBK 의혹을 제기해 대선정국을 뒤흔들어 놨던 김경준 씨의 누나 에리카 김이 귀국함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의 BBK 연루 의혹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BBK 사건은 김경준 씨가 2001년 주가조작으로 주주들에게 384억 원의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주가조작과 횡령 혐의로 국내에 송환돼 조사를 받던 김 씨가 메가톤급 폭탄발언을 하면서 BBK 뇌관은 수면위로 급부상했다. 김 씨는 옵셔널벤처스의 전신인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라고 폭로했다. 에리카 김 역시 동생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의 이면계약서까지 제출하며 동일한 주장을 펼쳤다. BBK의 실소유주는 이 후보이며 주가조작에 이 후보가 관련된 LKe뱅크 계좌가 활용됐다는 남매의 주장은 당시 이 후보의 정치생명을 뒤흔들 만큼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
BBK의 실소유주가 누구냐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됐던 까닭은 이 대통령의 차명보유 의혹이 제기된 ‘도곡동 땅’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마스터키였기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의 친형 이상은 씨와 처남인 고 김재정 씨가 함께 소유했던 (주)다스는 BBK에 190억 원을 투자했는데, 다스는 도곡동 땅 매각대금의 일부를 투자해 만든 회사라는 점에서 연결고리가 있었다. 즉 BBK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가 밝혀진다면 다스와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에 대한 의문도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선정국을 뜨겁게 달궜던 치열한 공방전은 김경준 씨의 참패로 끝났다. 이 후보에 대한 검찰조사 및 특검 결과는 무혐의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 김 씨를 구속시킨 검찰은 이 후보가 BBK와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김 씨가 대법원에서 징역 8년에 벌금 100억 원을 확정받으면서 BBK를 둘러싼 의혹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세인들의 관심사에서 점점 멀어져 갔던 BBK 사건은 이 사건의 열쇠를 쥔 몇 안되는 인물로 지목받고 있는 이른바 ‘BBK 키맨’들이 잇따라 귀국하면서 다시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정치권과 청와대는 이들 키맨들의 입에서 새로운 주장과 폭탄 발언이 터져나올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분위기다.
김경준 씨와 함께 옵셔널벤처스의 자금 319억 원을 횡령한 것을 공모하고 BBK가 이 대통령 소유라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는 에리카 김이 밝힌 귀국 배경은 ‘사업’이다. 2008년 2월 미국 법원으로부터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가택연금 6개월에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아 미국에서 사업을 하기 어려운 여건에 처한 그녀가 한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귀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사법처리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점에서 사전에 모종의 딜이 오갔다는 이른바 기획입국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녀가 ‘BBK 실소유주는 이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진술을 하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내려진 기소중지 조치를 풀고 나아가 자신의 사업 편의를 봐주기로 사정당국과 사전에 조율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이 그것이다.
실제로 에리카 김이 귀국 전 대리인을 통해 검찰조사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때 검찰로부터 “동생이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마당에 누나까지 구속할 사안은 아니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고소돼 검찰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에리카 김이 자진해서 귀국한 배경에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에리카 김은 귀국 직후 검찰에 자진 출두해 “2007년 대선 당시 ‘BBK 실소유주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라고 주장한 것은 거짓말이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에리카 김은 왜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면서 백기투항를 선택한 것일까.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에리카 김의 귀국이 BBK 의혹을 털어주는 대가로 동생을 구하려는, 일종의 고육지책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김경준 씨가 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을 뿐 아니라 자신도 궁지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주장을 반복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가 귀국 이유로 ‘사업’을 거론한 만큼 혐의를 부인하기보다 인정하고 선처를 부탁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결국 사건을 들춰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덮기 위해 귀국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에리카 김과 더불어 BBK 의혹의 핵심단서를 쥐고 있는 인물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이다. 에리카 김과 함께 한 전 청장의 귀국이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특히 한 전 청장은 지난해 암 투병 중인 부인을 위해 귀국하려 했지만 ‘윗선’의 방해로 무산됐다는 그럴듯한 소문이 나돌았던 터라 그의 갑작스러운 귀국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여기에 한 전 청장은 자신에 대한 재판이 개시되지도 않은 상황이고, 자칫 구속될 경우 부인 병간호는 고사하고 옥바라지를 받아야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을 선택한 배경에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형국이다.
검찰은 이미 구속된 안 전 국장과 한 전 청장 간의 진실공방 과정에서 새로운 핵뇌관이 폭발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할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이 얽혀있는 사안은 ▲안 전 국장에게 차장 자리를 제의하면서 3억 원을 요구했는지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표적세무조사였는지 ▲한 전 청장이 인사 청탁 명목으로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그림로비를 했는지 ▲도곡동 땅 실소유주를 확인할 수 있는 문서가 실제 존재했는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권과 청와대가 2년여간 치열한 폭로전과 공방을 벌여온 두 사람의 입에서 어떤 폭탄진술이 나올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사안들은 현 정권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혹이 말끔하게 해소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검찰은 ‘그림로비’ 의혹과 관련, 3월 3일 한 전 청장의 자택과 ‘학동마을’ 구입처인 서미갤러리 등에 대한 전격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하지만 재소환을 앞두고 있는 한 전 청장이 돌연 병원에 입원하는 등 수사에 적잖은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정치권에서 주목하고 있는 사안은 역시 BBK 의혹 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한 전 청장과 안 전 국장의 치열한 진실공방전이 예고되고 있는 가운데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안 전 국장의 입에서 추가 폭탄발언이 쏟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 전 국장은 “포스코건설 세무조사 당시 이 대통령이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라고 적힌 전표를 발견했는데 한 전 청장이 이를 은폐하고자 나를 밀어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한 전 청장은 이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있고, 이번에 귀국한 에리카 김도 기존의 주장을 뒤엎고 있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어 사건은 새 국면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BBK를 둘러싼 이 대통령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이 사건은 이 대통령의 도덕성에 대한 비난으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BBK 의혹을 두루뭉술하게 감싸안고 출발한 이명박 정권은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집권 후반기에도 이 대통령을 끝없이 물고 늘어질 만큼 파괴력을 갖고 있는 사안이라는 점이다. 키맨들의 귀국은 이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해소시키는 약이 될 것인가 아니면 현 정권을 코너로 몰아넣는 독이 될 것인가. 국민적 이목이 이들의 입과 검찰에게 쏠리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