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캬바레 부인>의 한 장면. 원 안은 <호호전>(위)과 <삿뽀로의 밤사냥>. |
1980년대 한국 에로 영화의 지형도를 그릴 때 1982년은 상징적이다. 이 해에 충무로는 세 편의 에로 시리즈를 내놓는다. <애마 부인> <빨간 앵두> 그리고 <반노>. <반노>는 <반노 2>(1984)로 마감되면서 단명했지만 가장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었던 시리즈. 그리고 <애마 부인>과 <빨간 앵두>는 양대 산맥이다. 1996년까지 13편이 이어졌던 <애마 부인> 시리즈는 <파리 애마>(1988)와 <집시 애마>(1990)의 번외편까지 낳은 반면, 박호태 감독이 단 한 번도 메가폰을 놓지 않았던 <빨간 앵두> 시리즈는 1994년까지 8편이 이어졌다.
성적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유부녀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애마 부인>과 <빨간 앵두>는 그 톤이 달랐다. <빨간 앵두> 시리즈는 좀 더 거칠고 좀 더 축축했다. 특히 <빨간 앵두 2>(1985)는 1990년대 에로 비디오의 단초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한지일이 이후 ‘한시네마타운’을 설립해 내놓은 <정사 수표> 시리즈는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가 제작한 <젖소 부인 바람 났네 1, 2>(1995)는 <빨간 앵두 2>와 매우 흡사한 구조를 띤다.
8편의 시리즈가 나왔지만 유독 2편(그리고 3편)에 관심이 몰리는 건 단연 이수진(본명 이은경)이라는 배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그녀는 회계학을 전공한 후 패션을 공부하며 약 5년 동안 ‘샤넬 리’라는 이름으로 모델 활동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이수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도전한 그녀의 첫 작품은 <밤마다 천국>(1985). 디자이너로 등장하는 그녀는 여러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자아를 찾아간다.
<안녕 도오쿄>(1985)에 이어지는 <빨간 앵두 2>는 그녀의 존재감을 확고하게 다졌다. 이 영화에서 돈 많은 남자의 젊고 아름다운 후처로 등장하는 이수진은 남편의 젊은 비서(한지일)와 관계를 맺으면서 죄의식에 시달린다. 많은 노출을 하진 않지만 분위기를 야릇하게 만들었던 건 당시 한국영화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패셔너블한 란제리와 속옷들. 특히 심야의 소나기 신이 인상적이다.
에로보다는 해학 사극에 가까웠던 <빨간 앵두 3>(1986) 이후 이수진은 조금씩 진로를 수정한다. 이대근과 <오사까 대부>(1986)를, 최무룡과 <자유부인 2>(1986)를 찍은 그녀는 이후 액션이나 멜로 같은 장르에도 종종 나들이한다. 이수진의 필모그래피에서 독특함 점은 유난히 마초적 이미지의 남자 배우들과 맞추었던 파트너십이다. 데뷔작 <밤마다 천국>에서 유장현, 신영일, 김성겸 등 5명의 남자 배우와 대적(!)했던 그녀는 <빨간 앵두 3>의 김희라를 비롯해 1980년대 B급 에로 사극의 달인 문태선, 설명이 필요 없는 이대근, 태권도 선수 출신인 이동준 등과 호흡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엔 하재영, 임영규, 한지일 같은 멜로 파트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남자 배우에게도 밀리지 않는 힘이 그녀에겐 있었다.
당대 마니아들이 이수진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이전의 여배우들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이중성 때문이었다. 그녀는 <집시 애마>의 이화란처럼 서구적이진 않지만 전형적인 한국적 마스크와도 거리가 멀었다. 세련되면서도 감정 표현에 매우 적절한 얼굴은 멜로드라마에 맞춤이었고 쟈니 윤과 찍었던 <햄버거 쟈니>(1988)나 사극인 <호호전>(1988) 같은 영화를 보면 코미디에도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연기력도 좋은 편이었다. 만약 지금까지 활동했다면 브라운관의 카리스마 있는 중견 배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갑작스러운 은퇴가 찾아왔다. 1990년 가수 설운도와 결혼한 그녀는 지금까지 20년 넘게 연기자의 길을 떠나 3남매의 어머니로, 그리고 남편의 충실한 내조자와 작사가로 살아가고 있다.
6년 남짓한 활동 기간 동안 15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사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다양한 가능성과 이미지를 지닌 마스크의 소유자였지만 에로티시즘 일색이었던 1980년대에 데뷔했다는 게 어쩌면 불운이었다. 결혼과 함께 연기 생활을 미련 없이 접어 버린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