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마이더스>의 유인혜(김희애 분), 이명희 회장, 현정은 회장, <로열 패밀리>의 김인숙(염정아 분). |
드라마 제작 관계자들은 공식적으로 “드라마 내용은 현실과 관계가 없다”고 못 박는다. 명예훼손 등 소송의 소지를 없애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드라마가 어디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SBS 월화드라마 <마이더스>. 재벌가의 경영권 다툼과 인간의 욕망을 다룬 이 드라마에는 재벌가의 딸인 유인혜(김희애 분)가 등장한다. 방송이 시작된 이후 시청자들은 유인혜의 모습을 보며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을 떠올리곤 한다. 재벌 2세로서 경영 일선에 나선 여성 CEO의 모습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극중 ‘삼성가나 현대가에 못지않은 재벌’로 그려지는 유필상 가문을 이끄는 유인혜의 강단 있는 모습과 카리스마를 삼성의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인 이명희 회장과 연결 짓는 목소리가 적잖다. 유인혜가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운용하는 헤지펀드의 대표이듯 이명희 회장은 보유한 주식 평가액만 1조 8000억대의 이르는 ‘대한민국 0.01%’ 재벌이다. 유인혜의 고급스럽고 기품 있는 옷차림이 이명희 회장의 외양과 닮았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유인혜의 배다른 오빠인 유성준(윤제문 분)이 “감방 가는 것보다 맷값으로 때우는 게 낫지”라며 부하 직원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이 ‘맷값 폭행’으로 구설에 오른 M&M 전 대표 최철원 씨의 사건과 겹쳐졌다. 이에 대해 SBS 김영섭 책임 프로듀서(CP)는 “맷값 폭행 장면에 특별한 의미를 두진 않았다. 유성준의 성격을 보여주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판단은 전적으로 시청자에게 맡기겠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재벌가 며느리의 이야기도 묘한 기시감(旣視感)을 준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줄거리는 현실 속 재벌의 모습과 교차되며 시청자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MBC 수목드라마 <로열 패밀리>는 JK그룹의 며느리가 된 김인숙(염정아 분)이 남편이 사고로 죽은 후 역경을 딛고 재벌 총수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초 살림에 전념하며 쥐죽은 듯 살던 김인숙은 남편의 사망 소식에 좌절하지 않고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한다.
이 같은 모습은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과 일부분 맞닿아 있다. 현 회장은 지난 2003년 고(故) 정몽헌 회장이 죽은 후 경영 전면에 나섰다. 원래 내조에만 전념했다가 현업에 뛰어든 현 회장은 정몽헌 회장 못지않은 실력과 배포를 앞세워 위기에 빠진 현대 그룹을 수렁에서 건졌다. 최근에는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현대자동차그룹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현대가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됐다.
<욕망의 불꽃>의 윤나영 역시 재벌가 며느리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자신의 남편을 회장으로 앉히기 위해 동서 남애리와 경쟁하는 모습은 권력을 추구하는 재벌가의 단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로열 패밀리>의 한희 CP는 “상상력에만 의지해서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다. 실제 사례를 취재한 내용과 창작한 부분이 적절히 섞여 있다. 하지만 두 가지의 경계가 명확히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희 CP는 이어 “드라마가 특정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민감해질 수도 있다. 그런 내용이 뜻하지 않은 구설을 가져오거나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덧붙였다.
드라마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사는 재벌가 사람은 보기 힘들다. 대부분 가족사가 얽히고설킨 출생의 비밀로 점철된다. <욕망의 불꽃>에서 영민(조민기 분)의 아들 민재(유승호 분)는 회장의 주식을 상속받는다. 하지만 영민(조민기 분)은 민재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직면하며 괴로워한다. 화제 속에 종영된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도 주인공 주원(현빈 분)의 가족들은 대부분 배다른 형제다. <마이더스>의 유인혜 역시 자신을 축출하려는 배다른 오빠와 정면 대결한다.
현실 속 재벌가에도 복잡한 가족 관계는 존재한다. 지난 2006년에는 한 자매가 사망한 재벌총수가 자신의 아버지라 주장하며 인지청구소송을 낸 적이 있다. 당시 재판을 담당한 서울가정법원은 유전자 검사를 벌인 끝에 “친딸이 맞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 5월에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차녀인 신유미 씨가 호텔롯데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신 씨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세 번째 부인인 미스 롯데 출신 서미경 씨의 외동딸이다. 그동안 롯데그룹은 장남인 신동주 일본롯데 부회장,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장녀인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 등이 3파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신유미 씨가 경영 일선에 나서며 후계자 구도의 변화에 관심이 집중됐다. 한 외주 제작사 관계자는 “이런 가족 관계가 반드시 재벌가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재벌이 갖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더욱 대중의 주목을 받고 드라마의 소재로도 쓰이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최근 드라마에는 재벌 3세 여성 이야기도 부쩍 늘었다. 삼성 현대 등 재벌가에서 3세 여성들이 경영 전면에 등장하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로열 패밀리>의 조현진(차예련 분)은 세련된 옷차림과 명석한 두뇌가 돋보이는 재벌 3세다. MBC 드라마 <남자를 믿었네>에 등장하는 식품회사 전무 김화경 역시 차기 재벌총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다. 김화경 역을 맡은 배우 우희진은 “캐릭터를 연구하기 위해 삼성가의 3세 이부진을 비롯해 여성 CEO들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봤다”고 말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드라마 속 재벌 3세의 모습 속에 실존하는 재벌 3세 경영자들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의미다.
재벌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드라마 제작진이 재벌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희소성 때문이다. 대중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 “여의도와 테헤란로의 수많은 빌딩 중에 왜 내가 가진 건 없을까, 저 많은 빌딩은 누가 갖고 있을까 라는 궁금증에서 드라마를 시작했다”는 <마이더스> 강신효 PD의 말은 재벌 드라마가 범람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