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캐’ 아닌 ‘소시민 영웅’으로 변신…“평범한 사람들의 디테일 표현하고자 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를 스크린 안에 다 세팅하는 거예요. 시나리오를 볼 땐 ‘대체 그 도시를 채울 수십 명의 외국 배우들을 어디서 데려오나’ 생각했었는데 몇 개월에 걸쳐서 아프리카, 유럽 각지에서 오디션을 봐서 모으더라고요. 굉장히 무모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었는데 정말 철저하게 이 프로덕션에서 준비를 다 한 거예요. 류승완 감독님의 그런 철저한 준비와 점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죠. 지금 영화를 보면 ‘우리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실감나게 나와서 기쁘기도 한데, 아마 스태프들은 (또 촬영할) 엄두가 안 날 거예요(웃음).”
코로나19의 4차 대유행과 맞물려 사회적 거리두기가 격상하고 있는 시기에 김윤석의 신작 ‘모가디슈’는 예정됐던 7월 28일 개봉을 강행했다. 철저한 준비, 완벽한 점검, 믿고 보는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류승완 감독의 ‘이름 값’이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당당히 제 몫을 해낼 것이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자신감이 입증되듯 ‘모가디슈’는 개봉 전부터 예매율 1위를 달리는가 하면 평단부터 일반 관람평까지 줄곧 호평을 이어가고 있는 수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91년 소말리아 내전으로 현지에 고립된 남북한 대사관 공관원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했던 실화를 그린 ‘모가디슈’에서 김윤석은 대한민국 대사 한신성 역을 맡았다. 그가 연기해 온 캐릭터들 가운데 아무래도 대중들의 인상에 더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던 ‘센 캐’, 즉 ‘타짜’의 아귀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의 윤석태, ‘1987’의 박처장 또는 ‘검은 사제들’ 속 김범신보단 바로 직전 작품이자 감독 데뷔작인 ‘미성년’ 속 권대원을 떠올리게 한다. 대사라는 직함에 어울릴 만큼 강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지닌 범상치 않은 인물이 아니라 살짝 소심하고 귀가 얇은 소시민의 모습이다.
“한신성 대사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 담겼죠. 그 점이 저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보면 영웅적인 행동을 막 즐기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다들 되도록 아무 탈 없이, 조용히 나의 삶을 살아 나가길 바라죠. 때때론 너무 우유부단해서 뭔가를 놓치기도 하고, 실수도 하고 고집도 피우고.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허점, 그런 모습이 한신성 대사에게 많이 담겨 있는 것 같고 또 그 점이 배우이기 이전에 인간 김윤석과 닮았어요. 다만 뛰어난 인간은 아닐지라도 생존이 걸려 있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 함께 협력하며 나오는 비범함, 그건 한신성이란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자 저랑은 다른 점인 것 같아요(웃음).”
한신성 대사가 가진 이런 소시민적 히어로의 모습은 김윤석으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한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업무적으로는 이미 20년 넘게 아프리카 지역에서 외교 기반을 다져온 북한에 한 없이 밀리고, 일상생활에서는 아내의 카리스마(?)에 눌려 군소리 없이 쭈그러져 있어야 하는 가장이자 시도 때도 없이 싸우는 참사관과 서기관을 중재해야 하는 피곤한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러나 생존의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지위와 이념을 넘어서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자체를 상징하는 캐릭터인 셈이다.
“원래 이런 장르에서는 굉장한 영웅적 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모두를 구출해 내는 게 제일 쉬운 코드죠. 그런데 그런 쉬운 길을 가지 않고 가장 평범한, 어떻게 보면 일반 사람보다 체력적인 능력도 떨어지는 한신성 대사 같은 사람을 내세운 거예요. 운동도 전혀 안하고 책상에 앉아서 서류만 보던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순간을 극복해 내고, 그 평범한 사람들이 합심해서 굉장히 비범한 선택을 해서 빠져나간다는 모습이 제게는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대사관 직원이라는 설정에 맞춰 김윤석이 연기한 한신성 대사와 조인성이 연기한 강대진 참사관은 극 중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신이 종종 있었다. 한 명은 완벽한 콩글리시를, 또 다른 한 명은 한국 억양으로 무장한 ‘완벽한 문법형 영어’를 구사한다. 분명히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한국어로 들리는 이 대사들은 류승완 감독의 특별 주문이었다는 게 김윤석의 이야기다.
“배경인 1991년도는 해외여행을 마음껏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배운 한국식 영어를 사용해야 했을 거예요. 그래서 혀를 굴리거나 (문법을) 생략하는 것은 다 필요 없고 그저 가장 또박또박하게. 우리 때 가장 유명한 참고서가 ‘성문종합영어’라고 있었는데 거기에 맞춰서 문법을 중요시 여기는 회화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게 감독님의 주문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대사니까 한국어를 섞어서 하는 강 참사관보단 영어를 아주 조금 더 잘하는 모습이거든요(웃음). 그런 차이는 감독님과 다 미리 이야기를 나눈 설정이었죠.”
이처럼 세심한 설정이 그대로 돋보일 만큼 김윤석의 연기도 그 자체만으로 섬세하게 다가온다. 대중들에겐 그의 ‘센 캐’가 좀 더 익숙할지 모르지만, 김윤석의 도전은 이렇게 디테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캐릭터에 조금 더 집중돼 있다고 했다.
“사실 배우는 항상 모든 역할이 도전이에요. 흔히들 ‘센 캐’라고 하는 ‘1987’의 박 처장이나 ‘황해’ ‘타짜’ 그런 캐릭터가 주는 극적이고 영화적인 쾌감도 물론 있죠. 하지만 제게 있어 또 다른 도전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디테일한 모습을, 에너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아주 섬세하게 표현하는 일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둘 다 도전이긴 한데(웃음), 제겐 늘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작업들이죠.”
김윤석의 이런 섬세한 연기는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지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따님, 아버님을 제게 주십시오” “국보급 미남 김윤석” “나보다 늙은 내 새끼 기뮨(김윤석)”이라는 애정 넘치는 플래카드 주접(?)으로 한때 온라인 커뮤니티의 핫 이슈가 됐던 팬들의 사랑과 맞물려 김윤석 역시 팬들에 대한 애정만큼은 뒤지지 않는다고. ‘미성년’(2019) 이후 본의 아니게 2년 만에 팬들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미안해하면서도 “오래 기다려주신 만큼 보람을 느끼게 해드리겠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우리 팬들 중에서 진짜 그렇게 기발한 아이디어로 문구를 만드는 분들이 있어요. 저도 보고 기가 차서 정말(웃음), 너무 웃기기도 하고. 이게 팬들하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소통하는 게 정말 굉장한 재미더라고요(웃음). 너무 고맙기도 하고, 저를 좋아해주시는 팬들이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셨는데 ‘모가디슈’로 거의 2년 만에 다가갈 수 있어서 설렙니다. 이번 작품 활동을 통해서 그분들이 팬으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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