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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003년 배우 진도희와 법적 분쟁 관련 한지일의 1인 시위 모습. | ||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영화사의 거인이었던 신상옥 감독은 신인 배우 발굴에 공을 들였다. 그들은 이른바 ‘신필름 사단’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1970년을 전후로 그 마지막 세대가 등장한다. 그 면면은 화려했다. 당대의 터프 가이 신일룡, 끈적끈적한 섹슈얼리티의 오수미가 있었고, 한 기수 아래로 패션 디자이너 하용수와 ‘백두사업’으로 유명해진 린다 김, 그리고 ‘한소룡’이라는 이름의 한지일(본명은 한정환)이 있었다.
1970년 <바람아 구름아>라는 영화로 데뷔했지만 그는 곧 배우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자가 된다. 그가 다시 충무로로 돌아온 건 1970년대 중반. 이미 서른 살 전후의 나이였지만 비로소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이두용 감독의 <경찰관>(1979)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한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
배우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 건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통해서였다. <길소뜸>(1985) <아다다>(1987) 등을 거쳐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그는 당시 충무로의 중요한 배우 중 하나였다. 동안이면서도 감성적인 마스크는 당시 찾아보기 힘든 마스크였고 연기력에서도 탄탄한 기본기가 있었다.
여기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꼼꼼히 살펴보면 두 개의 갈래가 보인다. 이두용 감독이나 임권택 감독의 수준작에 출연했던 필모그래피 곁엔 1985년 <빨간 앵두 2>부터 시작되는 에로티시즘 멜로드라마의 흐름이 있다. 하지만 이 장르에서 그는 배우보다는 제작자로서, 영화보다는 비디오로서 더 많은 지분을 지닌다.
1980년대 말 비디오 프로덕션의 맹아기에 한지일은 1989년 백상프로덕션을 설립한다. 창립 작품은 <매춘녀의 일기>. 이후 1990년에 한시네마타운을 만든 그는 <엄마 울지마> 같은 드라마도 만들지만 곧 성인용 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이 시기 한시네마타운은 유호프로덕션과 함께 비디오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특히 프랜차이즈 경쟁은 뜨거웠다. 유호프로덕션이 <야시장> 시리즈와 <성애의 여행> 시리즈를 내세웠다면 한시네마타운엔 <정사수표> 시리즈와 <젖소 부인> 시리즈가 있었다.
특히 <젖소 부인> 시리즈는 한국 에로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1992년 무명 신인이었던 진도희를 발굴한 한지일은 <젖소 부인> 시리즈를 통해 에로 비디오 시장에도 드디어 스타 시스템을 도입한다. 결국은 무산되었지만 극장용 장편영화로 <젖소 부인> 시리즈를 기획하기도 했다. 정세희를 내세웠던 <탈선 춘향전>(1997)은 해외 포르노 시장에 진출하기도 했다. 미국 쪽 수입사가 마음대로 편집해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정사 수표 8>(1994)엔 샤론스톤 실비아라는, 이름은 조금 요상하지만 외국 여배우를 출연시키면서 한국 에로의 국제화에 힘쓰기도 했다. 한지일 자신도 에로 버전의 <드라큘라>에서 외국 여배우와 공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IMF가 오면서 모든 것은 무너졌다. 100억 대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고 그는 한때 택시 기사를 하기도 했다. 아내와 이혼했고 진도희와의 지난한 법적 분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300여 편의 비디오 영화를 제작했지만 남은 것은 없었고 2000년 이후 피망 픽쳐스 등 몇 개의 브랜드를 이끌었지만 이미 에로 비디오 시장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수많은 위기를 거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한지일은 지금은 배우나 제작자의 길에서 한 걸음 정도 빗겨 서 있는 듯하다. 하지만 쉼 없이 이어지고 있는 건 40년 넘게 해왔던 자선 활동. 최근 한 인터뷰에서 “에로계의 대부라는 말은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한지일. 배우로서 컴백을 꿈꾸고 있는 그의 희망이 이뤄지길 바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