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1년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 각 구단 1차 지명선수들. 왼쪽부터 넥센 윤지웅, SK 서진용, 롯데 김명성, LG 임찬규, KIA 한승혁, 삼성 심창민, 한화 유창식, 두산 최현진. |
# 1차 지명자 수난사
“예전엔 1차 지명자가 1군에 가장 먼저 오르는 선수를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은 프로에 오자마자 첫 번째로 드러눕는 선수를 뜻한다.”
LG 관계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LG는 1990년대 알아주는 강팀이었다. 1차 지명자 덕분이었다. 고졸이든 대졸이든 프로에 입문하자마자 주전을 꿰찼다. 정규시즌엔 시쳇말로 날아다녔다. 신기하게도 아픈 선수가 없었다. 1990년 김동수, 1991년 송구홍, 1992년 임선동, 1993년 이상훈, 1994년 유지현, 1995년 심재학, 1997년 이병규, 1998년 조인성이 그랬다.
하지만, 2000년대 들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1차 지명자 덕을 거의 보지 못했다. 거액을 안기며 큰 기대를 걸지만, 1·2군을 전전하다 은퇴하거나 1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방황하기 일쑤였다. 입단하고 얼마 있다가 수술대에 눕는 이도 많았다. 2000년 이후 LG 유니폼을 입은 1차 지명자 가운데 현재 주전으로 뛰는 선수는 불펜의 이동현(2001년), 2루수 박경수(2003년), 봉중근(2007년), 오지환(2009년)뿐이다.
따지고 보면 1차 지명자들의 수난은 LG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8개 구단의 1차 지명선수 58명 가운데 명실공히 팀의 주축선수로 꼽을 수 있는 선수는 SK 김광현·최정, 삼성 박석민·김상수, 두산 임태훈·이용찬, 롯데 장원준·장성우, KIA 곽정철, LG 봉중근·오지환 등 10명 안팎이다.
1차 지명자의 수난은 최근 들어 더 심해졌다. 지난해 8월 열린 ‘2011 신인지명회의’에서 8개 구단은 심사숙고 끝에 1라운드 지명자를 뽑았다. 한화 유창식, LG 임찬규, 넥센 윤지웅, 삼성 심창민, 롯데 김명성, 두산 최현진, SK 서진용, KIA 한승혁이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
야구계는 “2005년 이후 1차 지명자들의 기대치가 가장 높다”며 “이들 가운데 최소 4명은 프로 데뷔 즉시 1군 무대에 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전망은 빗나갔다. 8명의 1차 지명자 가운데 1군 진입이 확실한 선수는 유창식과 윤지웅 정도다. 나머지 선수들은 정규 시즌을 2군에서 맞을 가능성이 크다. 이유는 간명하다. 김명성을 빼고 죄다 아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1차 지명자들은 프로 입단과 함께 부상으로 신음하는 것일까. 과연 8개 구단 스카우트는 1차 지명자들의 부상을 알지 못한 것일까. 선수 보는 눈이 부족했던 것일까. 대표적인 예가 있다. SK 1차 지명자 서진용이다.
# 스카우트들 ‘부상보다 미래’
지난해 신인지명회의에서 SK는 1라운드 7순위로 경남고 우완 투수 서진용을 뽑았다. 서진용은 스카우트들 사이에서 “1라운드엔 뽑히기 어려울 것”이란 평가를 받았던 선수다. 고3때 투수로 전향해 경기 운영능력이 부족하고, 구종이 단조롭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SK 스카우트팀은 지금보단 성장 가능성에 주목했다. 시속 146㎞의 강속구와 투수경력 1년 차의 싱싱한 팔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1라운드 지명 후, 계약을 하려는 순간. 뜻하지 않은 부상을 찾아냈다. 오른 무릎 피로골절이었다.
무릎 피로골절은 말 그대로 무릎을 자주 사용해 생기는 부상이다. 베테랑 투수들에게 절대적으로 많다. 정형외과 의사들은 “무릎 피로골절이 심한 투수들은 공을 던지지 못하고, 던진다고 해도 구속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눈썰미가 있는 스카우트라면 쉽게 눈치 챌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SK 스카우트들의 주장은 다르다. “무릎이 불편한 19세의 투수가 어떻게 시속 146㎞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겠느냐”며 반문한다. 그러니까 1라운드 지명이 끝난 다음 아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이었다. 서진용의 무릎은 8월까지 멀쩡했다. 그러나 9월에 열린 고교야구 왕중왕전을 앞두고 무리하면서 무릎에 이상이 생겼다.
SK 스카우트팀은 서진용의 무릎 부상을 눈치채고 발 빠르게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도록 했다. 결과는 무릎에 금이 갔다는 것. 의사는 재활로도 금이 간 무릎이 붙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무릎에 핀을 박으면 확실하게 치유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SK는 후자를 선택했다. 왜냐? 시간이 걸리더라도 부상을 확실하게 잡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진용의 예에서 보듯 아마추어 유망주들의 부상 원인은 무리와 혹사가 대부분이다. 고졸 1차 지명자 전부가 고교대회에서 일주일 동안 9회 완투를 두 번 이상 기록했다. 지역예선에선 연장 완투도 부지기수였다.
혹사와 함께 고교야구의 훈련시스템도 문제다. 근래 고교야구는 과거처럼 혹독한 체력훈련을 하지 않는다. 기술훈련에만 매달린다. 투수는 강한 하체를 바탕으로 속구 위주의 투구를 해야 하는데 요즘엔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는 게 미덕이 됐다. 지도자들이 선수의 장래보다 당장 성적에 급급해 기교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프로 스카우트들이 부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과거 같으면 부상 선수들은 스카우트 대상에서 제외됐다. 조금 성장 가능성이 부족해도 부상 없는 선수들을 뽑았다. 그러나 2000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의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수술 성공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2006년 SK가 류현진 대신 이재원을 1차 지명한 건 류현진이 인천 동산고 시절 팔꿈치수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류현진은 한화에 입단해 대박을 터트렸다. 이재원은 좌투수 대타요원으로 활약하다가 지난 시즌이 끝나고서 입대했다.
류현진 이후로 스카우트 사이에선 ‘부상이 있어도 수술로 충분히 회복할 확률이 높으면 성장 가능성이 큰 선수를 뽑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지난해 신인지명회의를 앞두고 KIA는 한승혁의 팔꿈치 이상을 눈치챘다. 그러나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의 성공 가능성이 85% 이상임을 고려해 과감히 1차 지명했다. SK도 마찬가지였다. 수술 이후 충분히 재기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서진용에게 수술을 권했다.
의학기술 발전에 따라 1차 지명자의 성공여부를 알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