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배꼽 위의 여자> |
기회는 1980년에 왔다. MBC 신인가요제에 나간 그녀는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으로 참여한 홍콩의 아시아 아마추어 가요제에서 3위에 입상했다. 1983년에 1집 <별바라기>로 데뷔한 그녀는 고정 팬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 실력파 가수로 성장한다.
훤칠한 키에 서구적이면서도 나른한 느낌의 섹시한 마스크인 그녀가 처음으로 연기를 시도한 건 1989년의 TV 드라마 <형사 25시>. ‘스타가 될 때까지’라는 에피소드에서 여가수 역을 맡은 그녀는 같은 해 연극 ‘티타임의 정사’ 무대에 올랐고, 1991년엔 첫 영화 <핸드백 속 이야기>로 충무로에 진출한다.
하지만 이때는 그녀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우선 1989년에 시사 프로그램 MC였던 변호사 박경재와의 스캔들로 화제에 올랐다. 또한 1992년엔 한국 최초의 누드집인 <이브의 초상>의 모델이 되면서 사건에 휘말린다. 그녀의 누드집은 한국의 에로 콘텐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한국엔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집인 <산타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에 한 출판사에서 한국의 연예인을 모델로 한 누드집을 기획한다. 그 주인공이 바로 유연실. 당시로선 파격적인 5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은 그녀의 누드집은 안타깝게도 그저 그런 퀄리티의 사진으로 비판받았다. 더욱 안타까운 건 심의 당국의 처사. 행정당국은 누드집을 음란물로 간주해 출판사의 등록을 취소시켰고 법원에선 “필요 이상의 성적 자극과 색욕적 흥미만 호소하고 있다”며 “청소년은 물론 일반 성인층의 정상적인 정서를 해칠 가능성”을 인정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1995년에 대법원 판결에선 “예술성이 있는 화보집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도 현저히 변화하고 있는 만큼 일부 장면을 기준으로 음란하거나 저속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파격적인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조금씩 하락하고 있었다.
누드집이 나왔던 1992년 <뽕 3>로 ‘3대 안협네’가 되면서 에로 아이콘으로 떠올랐고, 뽕밭에서 상을 펴놓고 치르는 정사 신은 마니아들에게 회자되는 명장면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이미지는 그녀에겐 독이 되었다. 재능 있는 가수였고 가능성 있는 배우였던 유연실은 1990년대 초반 서서히 끝물에 접어들었던 에로 시장에서 그렇게 소모되었다. 당시 반짝하던 매체인 레이저디스크로 <Spirit and Body>이라는 영상집을 내기도 했지만 음반사는 노래방 영상으로 편집해버렸다. 누드집이든 동영상이든, 당시는 아직 때가 아니었고 그녀는 너무 앞서갔던 것이다.
이후 <물랭 루즈>(1993> <고금소총 3>(1995) <비상구는 없다>(1995) 등 몇 편의 영화와 <스페셜 걸>(1995) 등 몇 편의 비디오에 출연한 그녀는 1990년대 중반에 은퇴한다. 최근작은 이휘재가 주연을 맡았던 <그림 일기>(1999). 지인의 끈질긴 부탁으로 출연한 그녀는 이휘재가 친자 확인을 하는 꼬마의 이모 역으로 잠깐 얼굴을 내비쳤다.
스무 살에 ‘화류계’에 들어와 산전수전을 겪은 후 30대 중반에 훌쩍 떠난 유연실은 이후 수십 개국의 나라를 여행하며 한국 사회에서 크고 작은 스캔들로 시달렸던 마음을 달래며 여행 전문가를 꿈꾸기도 했다. 10년 넘게 근황을 알 수 없는 유연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국 땅 어느 곳을 여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