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공정위가 불법 리베이트를 제공한 9개 제약사 명단을 공개하자 제약ㆍ의료계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오른쪽 위 사진은 공정위 건물. |
공정위 발표 전까지 리베이트 수사는 사실상 답보상태였다. 복지부는 리베이트 사실을 폭로하는 제약업계 내부고발자에게 1억 원을 포상하겠다는 당근책을 내놨다. 이와 함께 검·경은 울산 공중보건의 파문을 중심으로 대가성 뇌물수수 혐의를 밝혀내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정부부처와 사정기관이 손을 잡은 후 리베이트 혐의가 드러난 제약사들의 이니셜이 하나둘씩 공개되면서 업계에 긴장감이 고조됐다.
그러나 기관들의 감시 의지는 리베이트 방식의 교묘함 덕에 한풀 꺾였다. 수사기관의 경우 대가성 여부를 법적 근거로 밝혀야 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일요신문> 992호 보도). 복지부의 당근책인 1억 원 포상을 두고도 김이 샜다는 분위기였다.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조차 이 포상제도의 의미에 대해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 대형 제약사 영업사원은 “거래처는 물론 담당 의사까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어떤 의사와 어떤 제약회사가 수사를 받는다고만 해도 고발자가 누구인지 당장 드러나기 마련”이라면서 “1억 원 때문에 업계에서 낙인찍히고 직장도 잃을 수 있는 선택을 어느 누가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불법 리베이트 수사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는 상황에 다시 긴장감을 준 것은 공정위였다. 공정위는 내부고발의 타깃을 바꿨다. 이미 퇴직한 제약사 영업사원들을 대상으로 양심고백시 포상하는 조건을 내건 것. 증거 수준에 따라 포상금액도 상향 조정하기로 했다. 공정위 측은 “한도액은 종전과 같은 1억 원이지만 과징금 규모에 따라 단계별로 지급 기준액을 상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전직’을 대상으로 하는 포상 방법은 효과를 발휘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퇴사한 영업담당자들의 제보가 한 달 사이 100건에 달할 정도로 쏟아졌고, 그동안 리베이트를 전한 구체적인 증거도 확보할 수 있었다”며 “어렵게 양심고백을 한 퇴직 사원들에 대해선 약속한 대로 포상금이 지급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양심고백을 바탕으로 공정위는 태평양제약 신풍제약 영진약품공업 삼아제약 스카이뉴팜 미쓰비시다나베파마코리아 뉴젠팜 한올바이오파마 슈넬생명과학(과징금 액수 순)을 대가성 리베이트를 건네 온 업체로 규정하고 이들과 거래한 의료기관 명단까지 추가로 발표했다.
공정위는 그동안 제약사들이 의사들에게 대가성 뇌물을 건네기 위해 골프 접대비, 상품권 로비, 번역료 등의 명목으로 리베이트 비용을 지출한 정황과 그것이 곧 거래로 직결된 증거를 포착했다고 밝혔다. 곧이어 적발된 제약사에 29억 60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하고 행정처벌 권한이 있는 복지부에 명단을 넘겼다.
적발된 제약사들은 해당 약품에 대해 약가 인하가 불가피하게 됐다. 또 제약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상호가 공개되다보니 쌍벌제의 부담을 느낀 의사들이 해당 제약사와의 거래를 거부, 사실상 영업활로가 막힌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전망이라고 한다.
이번에 명단이 공개된 한 제약사 관계자는 “퇴사한 사원들의 경우 얼마든지 회사에 대한 반감과 보복의 수단으로 제보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공정위가 간과한 건 아닌지 씁쓸함이 남는다”고 말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 역시 “제약업계 구조상 리베이트 문제에 있어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고 “그동안 대형 제약사들은 이니셜로 보호되고 중소업체들만 버젓이 명단이 공개된 게 단순히 운이 없어서라고 볼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의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한 내과 개업의는 “상당수 대형 제약사들의 경우 영업사원들 개개인에게 급여나 상여금 등의 명목으로 리베이트 비용을 지급하고 그 범위 안에서 실적을 올려오라고 경쟁을 시키는 시스템이다. 이후 영업사원이 리베이트 비용을 어느 병원, 어느 의사에게 얼마를 썼든 간에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처럼 되기 일쑤라 제약사 자체의 처벌로 이어지긴 힘들다”면서 “반면 자금 여력이 없어 영업사원들에게 개인 급여 등으로 리베이트 비용을 건넬 수 없는 중소 제약사만 수사 타깃이 되기 일쑤”라고 말했다.
한 성형외과 개업의는 리베이트 처벌로 약값이 인하될 것이란 정부 논리에 의문을 나타냈다. 그는 “리베이트 관행 때문에 약값에 거품이 있다면 약값을 결정하는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그리고 복지부가 당장 인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그렇게 된다면 리베이트 방식으로 먹고사는 기형적인 제약사들은 마진이 남지 않아 자연스레 문을 닫게 될 것인데 한꺼번에 약값을 인하하지 않고 리베이트 적발에 걸린 제약사들만 약값을 인하하게 하는 것은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선진국은 복제약에 대해 질적인 가치를 따로 매기고 있다. 그런데 국내에는 복제약을 복용한 후 두 시간 이후의 체내 흡수율이 오리지널 약제와 80~120% 정도만 맞아 떨어지면(생물학적 동등성 검사) 동일가격이 매겨지게끔 단순화돼 있다”고 전제하고 “로비로 거래를 하지 않게 하려면 약품의 질에 따라 거래하게끔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데도 이렇게 X파일을 터뜨리듯 의료계 전체를 범죄자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리베이트 문화 근절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제약업계와 의료계의 반발에 대해 복지부 측은 “정부기관에서 일괄적으로 약값을 인하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과 리베이트는 전혀 다른 문제다”며 “약값의 인상과 인하는 부수적인 효과이고, 우선 제약업계 내 잘못된 뇌물 수수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받아야 하는 문제”라고 밝혔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