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대표적인 스타의 등용문이었던 ‘미스 롯데’. 1978년 대회에서 27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1등을 차지한 사람은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원미경이었다. 열아홉 살이었던 그녀는 TBC 방송사 20기 탤런트가 되어 연기자의 길로 접어든다.
원미경은 빠른 시간 안에 주목받았다. 스무 살밖에 안 되었던 1979년에 그녀는 <너는 내 운명> <밤의 찬가> <제3한강교> <청춘의 덫> 등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수현 원작의 <청춘의 덫>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그리고 <너는 내 운명>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촉망받는 신인으로 떠올랐다.
이 시기 원미경은 멜로드라마를 중심으로 청춘 영화와 역사 드라마와 액션 영화를 넘나들며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하지만 1982년, 그녀가 5년차 배우가 되었을 때 충무로엔 ‘에로 전성시대’가 열렸다. <애마부인>(1982)의 개봉은 상징적 사건. 하지만 이 해에 원미경이 선택한 영화 <반노>(1982)는 <애마부인>이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영화였다.
1969년에 나온 염재만의 원작 소설 <반노>는 검찰에 의해 외설죄로 기소됐고, 이후 1심 유죄와 2심 무죄 판정이 나기까지 총 7년의 세월이 걸린 작품. <애마부인>에 가려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반노>가 지닌 거친 느낌은 시대를 앞서간 파격이었고, 원미경이 맡은 ‘홍아’라는 캐릭터는 남성에게 끝없이 육체를 요구하는, ‘육욕의 팜 파탈’이었다.
이후 원미경은 <물레야 물레야>(1983)와 <자녀목>(1984)으로 ‘여인 잔혹사’ 장르의 대표적 배우가 된다. 여성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억압하던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들에서 그녀는 <반노>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욕망을 억누르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던 <물레야 물레야>는 그녀에게 백상예술대상과 영평상 여우주연상을 선사했던 작품. <자녀목>은 그녀의 아름다운 몸 선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욕망의 세계로 돌아와 <변강쇠>(1986)의 ‘옹녀’가 된다. 타고난 강한 색기로 남성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녀는 ‘속궁합’이 맞는 사내를 찾아 헤매고 결국은 변강쇠를 만난다. 하지만 천하의 한량인 변강쇠는 죽게 되고 옹녀는 슬픔에 차 눈 위를 뒹구는 유랑의 여인이 된다. 자칫하면 흥미 위주의 에로 사극에서 볼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었지만, 옹녀가 된 원미경은 섹시함과 코믹함과 애절함이 결합된 뛰어난 연기력으로 영화의 격(!)을 높인다.
이 점은 에로티시즘과 결합된 그녀의 영화들이 싸구려로 취급되지 않았던 이유다. 이른바 ‘벗는 영화’와 타협하지 않으면 여배우가 살아남기 힘들었던 1980년대, 원미경은 그 한계를 연기력으로 돌파했던 몇 안 되는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원미경이 영화배우로서 날린 마지막 펀치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2)일 것이다.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그녀는 이 영화에서 섹슈얼리티에 얽매여야 했던 20대에 안녕을 고하듯, 리얼리즘의 세계로 접어든다.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 영화 후 <화엄경>(1993)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난 원미경은 TV 드라마 <아줌마>(2001)로 화려한 40대를 맞이했지만 남편(이창순 PD)과 함께 곧 미국으로 떠난다. 마지막 작품은 TV 드라마 <고백>(2002). 현재 아이들을 돌보며 미국에서 살고 있는 원미경의 컴백은 당분간은 힘들어 보인다.
동양적이면서도 서구적 느낌이 풍기는 미모와 지긋이 내려 뜬 눈에서 풍기는 색기로 관객을 압도했지만, 원미경의 가장 큰 미덕은 자연스러운 연기 톤이었다. 올해 52세가 된 원미경. 그녀의 컴백을 기다린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