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10월 10일 중국 헤이룽장(흑룡강)성의 무단장(목단강)에서 태어난 서금강은 화가를 꿈꾸는 미술학도였다. 대륙을 가로질러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그는 광저우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두 살. 그는 꿈을 펼치기엔 드넓은 대륙보다는 오히려 홍콩이 낫다고 생각했다.
큰 키에 매끈하면서도 근육질인 몸을 무기로 모델 일을 시작하던 그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고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다. 밤엔 나이트클럽에서 가수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1983년에 유가휘 감독의 <소림여무당>을 시작으로 100여 편에 달하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시작된다.
180㎝가 훨씬 넘는 키에 번쩍거리는 머리, 그리고 콧수염과 근육질이 만들어내는 강한 마초적 이미지는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 독보적이었다. 그의 활동 무대는 주로 쿵푸 영화나 액션 장르였다. 특히 소림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엔 달리 분장이 필요 없는 그의 외모가 빠지지 않았다. 액션이나 호러 장르에서의 악역 조연은 당시 서금강의 전문 영역이었으며 종종 코미디에서 실없는 남자로 등장했다.
그의 영화 인생이 조금씩 빛을 본 건 1980년대 후반이었다. ‘홍콩 느와르’의 붐 속에서 <영웅무언>(1986) <영웅호한>(1987) <천라지망>(1988) 등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용호풍운>과 <성향기병> 시리즈의 단골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30대에 접어든 1991년 그는 개성파 조연을 넘어 하나의 아이콘이 된다. 바로 <옥보단>(1991)을 만난 것이다.
<옥보단>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주인공 ‘미앙생’ 역을 맡은 오계화를 기억하지 않았다. 쇠사슬을 그네처럼 타며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정사 신을 선보이고 욕조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섹스에 목말라 있던 마님을 겁탈하던 ‘왕칠’ 역의 서금강은 이 영화의 진정한 엑기스였다. <옥보단>의 그는, 마치 이 장르를 위해 태어난 배우와도 같았다.
에로든 아니든 이후 서금강에겐 엄청난 캐스팅 제의가 쏟아진다. <신용문객잔>(1992) <녹정기>(1992) 등 메이저급 영화에서 그를 볼 수 있었고, <수호전지영웅본색>(1993)의 ‘노지심’ 캐릭터도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이 시기 주류 장르는 에로였다. <옥보단> 이후 10년 동안 그는 ‘에로인’으로 살았고 <옥보단> 2편(1996)과 3편(1998)에 등장하면서 시리즈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옥보단>의 쇠사슬 신 외에 그가 남긴 에로 명장면이라면 <만다린>의 풍차 돌리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 숲속에서 남녀가 ‘섹스 내공’을 겨룬다는 설정 속에서, 그는 궁극의 섹스 판타지를 선보인다. <단추도 채우지 않는 여자>의 ‘빗속 거리 정사 신’도 그의 절륜한 공력을 만날 수 있었던 장면.
한편 <색정남녀>(1996)에선 ‘대머리 포르노 배우’로 등장해 자신의 이미지를 반영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진솔한 내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소녀진경>(1996). 원래는 <옥보단> 시리즈의 3편으로 기획되었던 <옥보단>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 영화에서 서금강은 미앙생 캐릭터를 맡아 성전(性典) <옥보단>의 탄생 비화를 밝힌다.
1999년에 미인대회 출신인 테레사 라우와 결혼하고 40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에로 경력은 조금씩 수그러진다. 한때 1년에 스무 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던 서금강은 조금씩 잊혀가는 배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호방한 에로틱 액션은 영원히 잊지 못할 전설의 스펙터클! 그를 뛰어넘는 ‘정력의 화신’은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