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스타를 통해 프랑스 여배우의 세 가지 타입을 정리하자면 가장 먼저 화려한 카트린느 드뇌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뜨거운 브리지트 바르도가 두 번째 유형일 듯. 그렇다면 잔느 모로는 이지적이며 차가운 느낌의 여배우들에겐 대모격인 배우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기계적인 연기를 수행하는 배우가 아니라 열정을 차갑게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은막의 자유주의자였다.
잔느 모로는 192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인 바텐더였고 어머니는 전직 코러스 걸.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인 1939년 잔느 모로의 부모는 열한 살의 잔느를 가운데 놓고 이혼한다. 그녀는 여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고 파리예술학교 시절에 이미 프랑스 국립극단의 스카우트를 받아 스무 살에 국립극단 사상 최연소 단원이 되었다.
연극계에선 날리던 배우였지만 영화 쪽에선 쉽지 않았다. 그녀가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작품은 서른 살 때 만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 사라진 애인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잔느 모로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만난 루이 말 감독과 연인이 된 잔느 모로는 <연인들>(1959)에서 다시 호흡을 맞추었는데 파격적이지만 아름다운 성 묘사로 전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었는데 수입 당시 검열에서 영화윤리위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있었고 영상미를 높이 사 통과시키긴 했지만 몇몇 위원들은 불만을 품고 사퇴했다.
그녀가 영화계에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던 1950년대 말은 프랑스 영화계가 누벨바그의 열풍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그들은 틀에 박힌 연기를 반복하는 기존 연기자보다 새로운 이미지의 배우를 원했고, “관습적인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고 말하곤 했던 잔느 모로는 그들이 가장 탐내는 배우였다.
사실 그녀는 바르도처럼 글래머도, 드뇌브처럼 인형 같은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촬영 감독이 불평했던 것처럼 포토제닉한 배우도 아니었다. 하지만 잔느 모로에겐 가장 추한 표정을 지었다가도 몇 초 만에 매력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탁월한 변신의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섹시함은 지성과 감성이 황금비율로 혼합된 상태에서 뿜어져 나왔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영화의 보석이었다. 불타오르는 듯한 여인이었지만 자신의 진심은 감추고 있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갑작스럽게 폭발시킨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쥴 앤 짐>(1959)에서 비극적이면서 자기 파괴적인 로맨스의 주인공 카트린느가 되며 확고히 자리를 다진 잔느 모로는 여러 시네아스트들의 뮤즈가 되었다. 1960년대는 그야말로 화려한 전성기. 유럽을 대표하는 배우가 된 그녀를 할리우드도 가만두지 않았고, 특히 오손 웰즈는 총 네 편의 영화에 잔느 모로를 캐스팅했다. 대서양 양편을 오가는 활약으로 그녀는 1966년에 비영어권 배우로는 최초로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 모델이 된다.
이후에 잔느 모로는 뤽 베송의 <니키타>(1990), 빈센트 워드의 <내 마음의 지도>(1992), 앤디 테넌트의 <에버 애프터>(1998) 같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젊은 감독들의 기를 살려 주었다.
벌써 83세가 된 할머니 잔느 모로는 놀랍게도 아직도 현역이다. 63년차 배우인 셈. <엘르>에서 주선한 바네사 파라디와의 대담에서 “당신은 전설적이며 신화적”이라는 파라디의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진부한 말일 뿐이죠. 난 ‘아마추어’라는 말이 좋아요. 그건 재능과 사랑을 함축하니까요.” 그리고 작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이는 당신을 사랑으로부터 막지 못하죠. 하지만 사랑은 어느 정도는 당신이 나이 먹는 걸 막아줍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