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멘스클럽’은 외항선원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곳으로 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중앙 무대에서는 필리핀 혼성밴드가 라이브공연을 하고 있었다. |
그 중심에는 신포동의 명물로 손꼽히는 씨멘스클럽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클럽은 외로운 바다남자들, 즉 마도로스들이 자주 찾는 유서 깊은 업소로 유명하다. 오랜 기간 외국인 선원들의 아지트로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3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로데오 거리에만 이런 씨멘스클럽이 2곳이나 운영되고 있었다.
기자가 한 씨멘스클럽에 들어서려 했을 때, 한 여성 포주가 다가왔다. 그는 기자에게 ‘외국인’ 여부를 확인했다. 원칙적으로 씨멘스클럽은 ‘외국인 전용카지노’와 같이 ‘외국인’들만을 상대로 하는 전용주점이기 때문이다. 내국인의 출입은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자가 외국인 친구의 소개로 왔다고 말을 건네자, 포주는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 곳곳에는 몇몇 외국인들이 무리를 지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클럽은 생각했던 것보다 단출했다. 공간은 꽤 넓었지만, 빈약한 조명기기와 오디오시설, 그리고 허름한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클럽 구석에는 혼자 오는 손님들도 술을 마실 수 있게끔 ‘모던 바’가 꾸며져 있었다. 90년대 촌스러운 ‘나이트클럽’과 ‘모던 바’가 혼재된 특이한 구조였다. 중앙에 위치한 무대에서는 필리핀인들로 구성된 혼성 밴드가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팝송이었지만 귀에 익은 국내 가요도 이따금씩 들려왔다. 여성보컬의 한국어 노래 실력은 얼핏 들어도 대단해 보였다. 클럽 한 쪽에 위치한 포켓볼 당구대에서는 외국인 손님들이 접대부들과 짝을 이뤄 시합이 한창이었다.
기자가 안내받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포주가 다가왔다. 포주는 “맥주 3병과 과일안주가 기본 메뉴이며 꼭 ‘레이디 주스’ 한 잔을 시켜야 한다. 그럼 필리핀 아가씨가 친절히 접대할 거다.”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레이디 주스’는 이곳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였다. 씨멘스클럽에는 손님들을 상대로 하는 동남아 출신 접대부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외로운 마도로스들의 마음을 달래줄 일종의 말동무 서비스였다. ‘레이디 주스’라 불리는 2만 원짜리 오렌지 주스를 시키면 접대부들이 합석을 하게 된다. 접대부들이 주스 한잔을 다 마실 동안 손님들을 상대한다. 레이디 주스 한 잔이 나가면 접대부들에게는 5000원 상당의 티켓이 주어지며 접대부들과의 시간을 연장하려면 주스 한 잔을 추가로 시켜야 한다.
테이블에 합석한 지나 씨(가명·26)는 필리핀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신출내기 접대부였다. 그래선지 한국말이 매우 서툴렀다.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밖에 안됐다. 필리핀에 딸린 가족이 많다. 남녀 형제들이 모두 6명이 넘는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데 필리핀에는 일자리가 없다. 연예인 비자를 받아 한국에 오게 됐다. 비자가 만료되면 다시 필리핀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지난 과거 가족을 위해 상경해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우리네 ‘누나’들과 비슷했다.
동남아 출신 여성 접대부들이 한국에 오는 것도 결코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나 씨는 “보통 연예인 비자를 받으려면 현지 브로커를 통해 몇 차례 오디션을 받아야 한다. 어렵게 한국에 왔고,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업소에만 이러한 동남아 출신 접대부들은 10명이 넘었다. 그들은 모두 업소 2층에 마련된 개인숙소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쉰다는 이들의 근무환경은 녹록지 않아보였지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했는지 타국생활에 나름 만족하는 눈치였다.
30년 넘게 외국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온 이 업소는 최근 몇 년 사이 큰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인천항 이외에 인근 도시에 많은 국제항들이 신개발 및 재개발되면서 외국 선원들의 발길이 뜸해졌다는 것이다. 대신 최근에는 인근 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입소문을 듣고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 왔다는 한 남성은 “이 곳은 최근 동남아 노동자들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외국인 선원들이 오가고 있지만 요즘은 나와 같이 남동공단에서 일을 하고 있는 상주 외국인 노동자들이 더 많다. 이곳에서 일하는 접대부들 대부분은 동남아 출신이다. 향수를 찾아 이곳에 온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자리한 주변 테이블에는 상주 노동자들로 보이는 동남아 출신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씨멘스 클럽은 국세청으로부터 ‘외국인 전용 업소’ 허가를 받은 특수 업소다. 기자와 만난 한 클럽 관계자는 “이 곳은 국세청으로부터 ‘외국인 전용업소’ 특별 허가를 받은 희귀 업소다. 인천에 단 두 곳밖에 없다. 국세청은 이 두 업소 이외에는 전용 업소 사업자를 내주지 않는다. 새로운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거의 독과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원칙적으로 이곳은 내국인 출입금지구역이다. 이따금씩 국세청이 접대부들의 비자단속과 더불어 내국인 출입단속을 나온다. 다만 최근에는 외국인 선원들의 출입이 줄어들고 있어, 어느 정도 내국인 입장을 허용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새벽 1시가 넘어 기자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도 타향살이에 지친 외국인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테이블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