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우리들에겐 ‘책받침 여신’들이 있었다. 플라스틱 비닐 속에 코팅되어 고이 간직되던 ‘천상의 존재들’ ‘상상 속의 연인들’, 그들은 입시 경쟁의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우리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요정들이었다. 브룩 실즈가 완벽한 아름다움의 표본이었고 피비 케이츠가 청순함과 관능미의 황금 조합이었다면 나스타샤 킨스는 이국적인 야수성을 내세웠다. 또한 다이앤 레인이 세련된 섹시함이었다면 소피 마르소는 여자친구 삼고 싶은 친근한 이미지였다.
1966년에 파리에서 태어난 소피 마르소는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이고 어머니는 백화점 점원이었다. 13세 때 우연히 참가한 <라 붐>(1980) 오디션에서 700: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고 파리에서만 450만 명이 관람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진 <라 붐 2>(1982)도 전작 못지않은 성공을거두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프랑스 인형’ 스타일의 여배우가 한 명 등장한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열여섯 살(프랑스에서 어른 대접을 해주기 시작하는 나이)이 된 소녀는 세 번째 작품부터 조금씩 노출을 감행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소피 마르소의 ‘속살’을 볼 수 있었던 영화는 <나이스 쥴리>(1984)였다. 당시 하이틴이었던 소피는 전설적인 배우 장 폴 벨몽도와 호흡을 맞추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블라우스를 벗고 ‘노브라’ 상태를 드러냈다. 제라르 드파르디외와 공연한 <폴리스>(1985)에서도 가슴 노출은 이어졌고,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격정>(1985)에선 정면 올 누드와 엉덩이 노출을 시도했다.
피비 케이츠가 <파라다이스>(1982)나 <프라이빗 스쿨>(1983)에서의 노출을 후회하고, 브룩 실즈가 <블루 라군>(1980)을 찍으며 노출 신(나체로 수영하는 장면)에 대역을 요구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소피 마르소는 달랐다. 그리고 그녀의 노출은 관음증을 자극한다기보다는 욕망의 순수한 표현처럼 보였다. 이것은 그녀가 지닌 서민적이면서도 수수한 이미지 때문이었고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몸은 노출을 위해 ‘튜닝’된 몸과 거리가 먼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격정>에서 시작된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과의 만남은 그녀의 영화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줄랍스키는 소피에게서 지적이면서도 섹시하고 감성적인 이미지를 찾아냈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1989) <쇼팽의 푸른 노트>(1991) 등의 영화를 함께 한 그들은 1995년에 소피가 아들 뱅상을 낳으며(26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이후 결별한 그들은 <피델리티>(2000)에서 다시 만났고 이 영화에서 그녀는 한층 성숙된 에로티시즘 연기를 보여준다.
줄랍스키와 만나면서 확실한 성인 배우로 발돋움한 소피는 <지옥에 빠진 육체>(1986)에선 <라 붐>에서 자신의 아버지 역을 맡았던 배우와 섹스 신을 찍었고 청순미를 앞세운 <유 콜 잇 러브>(1988)에서도 정면 누드를 선보였다. 이후 <고요한 펠리세이드>(1990) <사샤를 위하여>(1991) <팡팡>(1993) <달타냥의 딸>(1994) <구름 저편에>(1995) <마르키스>(1997) <파이어라이트>(1997) 등 그녀의 1990년대 출연작 중 대부분은 노출을 수반했다. 특히 존 말코비치와 함께한 <구름 저편에>는 그녀의 관능미가 절정에 달한 작품이었다.
이젠 31년차가 된, 어느덧 젖살은 다 빠지고 중년 여성의 푸근함과 여전한 미모를 동시에 지닌 여배우가 된 소피 마르소. 동시대 아이돌 여배우에 비해 그녀가 장수할 수 있었던 건 끊임없이 자신의 이미지와 틀을 깨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노출이나 에로틱한 설정은 하나의 수단이자 표현이었고 그렇게 과감히 드러냄으로써 소피는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한때 노출에 대한 강박감마저 있었던 소피 마르소. 이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