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녀>에 의사 역으로 잠깐 등장했던 배우가 있다. 눈썰미 좋은 중년 관객이라면 알아봤을 것이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떠올릴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배우 김진아. 1988년 이후 12년 만에 출연한 영화였다. 지난해 연말 어느 아침 프로그램에서 이유 없이 몸이 붓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병에 걸렸음을 고백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그녀. 배우 김진아의 그 시절을 돌아본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진아는 배우의 피를 타고났다. 아버지 김진규는 유현목 감독의 페르소나로 장르 영화보다는 진지한 드라마에서 온화하면서도 지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배우로 한국 영화사에 기록돼 있다. 어머니 김보애는 연극계와 영화계를 아우르는 연기자였다.
어린 시절 수많은 영화배우들이 집을 드나들었고 어린 김진아는 배우들을 흉내 내면서 이미 ‘싹수’를 보였다고 한다. 문희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에게 은근슬쩍 영화 출연을 권하는 영화인들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아역 배우 시절은 거치지 않았던 김진아는 중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갔고 메트로폴리탄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다.
대학 생활을 잠시 접고 귀국한 그녀는 어느 영화 시사회에 참여했다가 캐스팅 제의를 받는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1983)라는 영화를 준비하던 조명화 감독의 눈에 뜨인 것. 감독은 대배우 김진규와 김보애의 딸이라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제안을 했고 김진아는 그렇게 배우가 된다. 스무 살 때였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린 작품은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이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16세 청소년 역을 맡았던(그럼에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던!) 이 영화에서 방황과 반항의 10대를 연기한 그녀의 모습은 굳이 ‘김진규와 김보애의 딸’이라는 후광이 필요 없을 정도의 끼와 파워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1984)에선 신성일과 멜로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이 시기 당대 최고의 MC였던 허참과 쇼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화장품 CF 전속 모델이 되는 등 짧은 시간 안에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김진아의 등장은 1980년대적 현상이었다. 고전적 아름다움이나 퇴폐적 글래머와는 거리가 먼, 이국적이면서도 시크하고 패셔너블한 청춘스타의 등장. <애마 부인 3>(1985)의 염해리(김부선)나 <서울 무지개>(1989)의 강리나에게도 이런 느낌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당대의 에로 트렌드에 파묻혀 버렸다. 하지만 김진아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청춘 영화로 시작한 그녀는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1985) <밤의 열기 속으로>(1985) 등에서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신감각의 한국영화와 조우했고, <내시>(1986)에선 영화 한 편을 이끄는 힘을 보여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장난스러우면서도 눈매와 입가에 묘한 요기를 품은 그녀의 이미지는 악녀, 천사, 백치, 소녀, 요부, 성처녀 등을 오가는 규정되지 않은 이미지였다. ‘운명에 순종적인 여인’이라는 이른바 한국적 여성성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고, 발칙하면서도 암팡진 캐릭터 속에서 김진아는 놀라운 매력을 발산했다. 그녀는 한국의 브리지트 바르도였고, 당대의 ‘섹스 키튼’(sex kitten. 성적 매력이 넘치는 젊은 여자)이었다.
일련의 가십과 잡음이 있었지만 오히려 <삼색 스캔들>(1986)을 통해 자신의 스캔들을 영화적으로 돌파하는 용기(!)를 보여준 그녀는 <유혹 시대>(1986)와 <연산일기>(1988)에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돌연 그녀는 스크린을 떠나 미국으로 간다. 20대 후반의 이른 은퇴(?)였고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여배우는 그렇게 잊히는 듯 보였다.
이후 1995년에 TV 드라마로 컴백한 그녀는 2001년에 <명성왕후>, 2009년에 <순결한 당신> 등 이따금씩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칠 뿐 예전 같은 왕성함은 보여주지 못했다. 대신 자선 활동과 사업 등 연기 이외의 분야에 좀 더 힘을 실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영화에도 얼굴을 내비치는 등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는, 아직 40대인 젊은 배우 김진아. 그녀는 분명 1980년대의 아이콘이었고 이후에 그 시절의 김진아를 떠올릴 만한 당찬 느낌의 신인 여배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투병 생활을 딛고 중견 연기자로 다시 화려한 시기를 맞이하길. 사족 하나. 이덕화는 그녀의 이모부이며 최근에 배우 정애연과 결혼한 김성준(본명 김진근)은 김진아의 동생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