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정치권에서 수십 년간 다져온 ‘정치력’을 총동원, 신주류를 압박하자 명분과 대중적 지지를 앞세워 한때 대세를 장악하는 듯했던 신주류는 당혹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물류대란, 방미외교,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등 핵심 국정과제에서 잇따라 혼선을 보이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급락하고 그 여파로 개혁신당에 대한 기대감도 급감하자 중도파마저 신당추진 대열에서 한발 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5월16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신당 워크숍이 개최된 직후 신주류측은 신당 창당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고 자신했다. 신당추진모임 의장으로 선출된 김원기 고문도 “구주류를 최대한 설득해 늦어도 6월 초에는 당무회의를 통해 신당추진기구를 공식 발족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어진 상황에서 신주류는 정치적 미숙과 조급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기 시작한 반면 구주류측은 마치 ‘은인자중하던 주력함대’가 나서듯 결속력과 조직력, 전술적 치밀함 등을 보여주며 신주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신주류 강경파 핵심인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의원 등은 신당창당모임 구성 직후 서울 영등포구 양남동의 한 보신탕집에서 민주당 출입기자단과 오찬 모임을 갖는 자리에서 승리감에 도취된 듯 수위 조절 없는 발언을 내뱉어 구주류의 결속과 반발을 자초했다.
이날 신기남 의원은 반주로 먹은 술이 어느 정도 오르자 “선혈이 낭자한 권력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당 추진 과정에서 구주류측이 반발하면 당초 목적했던 개혁신당 창당을 위해 구주류측과 ‘피튀기는’ 권력투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이다.
신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은 당연히 구주류측이 가장 강력하게 반발해온 ‘인위적 인적청산론’으로 이해됐고 구주류의 결집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강철 대구시지부장 내정자의 ‘신당배제 인사론’이었다. 이 내정자는 기자들에게 정균환 총무, 박상천 최고위원, 김옥두 유용태 최명헌 의원은 ‘신당을 함께 하기 어려운 인사’라고 언급했다. 신주류측이 신당 배제 인사의 실명을 기자들에게 반공개적으로 거명한 것은 처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잡초론’에 이어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으로 통하는 이 내정자의 이 같은 발언은 신주류의 신당창당 의도에 의구심을 가져왔던 구주류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구주류로서는 신당 창당이 결국 구주류의 인위적 청산과 신주류의 주도권 잡기를 겨냥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 된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자 신주류 온건파들조차 이 내정자의 발언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신주류 온건파의 한 의원은 “이 내정자는 평생 국민의 선택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구주류라지만 어쨌든 국민의 선택을 몇 차례씩 받아 의원이 된 인사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강철 내정자의 발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내정자가 이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만에 다시 당무회의에서 신당추진기구 구성에 반대할 인사 15명을 기자들에게 거명한 것이다. 이번에는 김원기 고문과 정대철 대표까지 나서 이 내정자에게 주의를 주는 등 적극 대응에 나섰지만 중도파 이탈 조짐을 감지한 구주류측은 결코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그간 신당창당의 명분에 밀려 행보를 자제해온 구주류측은 잇따라 모임을 갖고 대응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선두는 의외로 동교동 신파인 한화갑 전 대표가 섰다.
한 전 대표는 지난달 25일 기자회견을 갖고 노무현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신당논란의 즉각 중단을 촉구했다. 그는 신당추진이 ‘대립과 반목을 부르는 분열의 정치’라고 규정하면서 신주류 강경파를 비난했다.
그는 ▲강경파가 분열과 논쟁으로 일관하며 국민과 민생을 외면했고 ▲당권 장악과 인적 청산을 내걸고 민주당을 파탄내고 있으며 ▲영남 진출의 목표를 위해 지지세력의 혼란과 대립을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구주류가 경쟁적으로 구애작전을 펼친 한 전 대표의 이 같은 입장 표명은 구주류의 조직적인 저항의 기폭제가 됐다. 먼저 구주류측은 6월 임시국회 대정부질문을 통해 신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제기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그 대표로 구주류 중에서도 ‘전투력’이 뛰어난 이윤수 의원이 선정됐다.
최근 정치권 사정수사의 표적이 됐던 이 의원은 “어차피 몰린 상황이니 가만두지 않겠다”며 의욕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이후 이 의원은 정균환 총무 등의 적극적 지원으로 예결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대정부 질문을 포기했다).
2단계는 구주류측의 예결위원 선임이었다. 16대 국회 마지막 예결위원은 17대 총선을 앞두고 있는 만큼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단 예결위원이 되면 지역구 사업과 관련한 예산을 따내는 데 누구보다도 유리한 입장이 된다.
실제로 예산 심의 과정에서 정부측은 예결위원들의 민원에 대해서는 최소한 1~2건은 들어주는 것이 관례다. 의원들로서는 차기 총선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 하나를 얻게 된다.
그런데 정균환 총무는 19명의 예결위원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신당 추진에 적극적인 신주류측 인사는 김희선, 이재정 의원 2명만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전원 구주류나 신당 추진에 부정적인 중도파 의원을 선임했다.
더구나 위원장에는 이윤수 의원을, 간사에는 박병윤 의원을 선임했다. 신당 창당을 둘러싼 신주류와의 전쟁을 앞두고 구주류 의원을 배려하는 동시에 차기 총선에서 신주류측과 공천 경쟁을 벌일 때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다.
그러나 구주류의 대응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30일 당무회의였다. 구주류측은 당무회의를 앞두고 긴급 모임을 갖고 신주류측의 ‘신당추진기구 구성안’의 당무회의 상정에 대한 저지 대책을 논의했다. 이미 정균환 박상천 이협 의원 등은 최고위원 회의를 통해 정대철 대표를 압박, 30일 당무회의에 추진기구 구성안을 상정하지 않도록 했다. 기습 상정을 대비해, 대응 시나리오도 짰다.
구주류측은 우선 신주류측이 구성안을 기습 상정하고 의장인 정대철 대표가 의사봉을 두드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 정 대표 좌우 양쪽에 최명헌 의원과 박상천 의원을 앉도록 했다.
당초 우측은 정균환 총무가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정 총무는 “내가 맷집이 약하다”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한다. 정 총무는 평소 골프 드라이브 비거리가 당내에서 1~2위를 다툴 뿐 아니라 덩치도 박상천 최고위원보다 훨씬 크다.
구주류는 또 의장 주변 자리에 김옥두 이윤수 의원 등을 포진시키고 신주류 강경파인 천정배 신기남 의원 정면 앞에는 입담이 좋은 이훈평 의원과 유용태 의원 등 후단협 인사들을 앉도록 했다.
구주류는 회의에 임하는 시나리오도 치밀하게 짰고 그 시나리오는 거의 계획대로 실행됐다. 회의가 열리자 마자 최명헌 의원은 곧장 공개회의를 주장했다. 신주류의 신당창당 주장을 공개 비판함으로써 논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이다.
김원기 고문이 회의 공개 여부는 의장이 결정토록 돼 있다며 저지에 나섰지만 구주류 김충조 의원은 그런 규정은 당헌 당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고 말해 결국 공개회의를 관철시켰다.
공개 여부가 결정된 뒤로 신당 논의는 진행되지 못했다. 구주류의 ‘전사’ 이윤수 의원이 이강철 대구시지부장 내정자에 대한 공개 비판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대통령 측근이라는 이강철씨가 누구를 내쫓으려고 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구시지부장이라는 중책에 임명할 수 있느냐”며 “이강철씨는 처음엔 5명, 나중엔 15명을 같이 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찍어서 말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주류 임채정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이 있다”며 제지하고 나서자 구주류 김옥두 의원은 “왜 말을 가로막느냐”며 이 의원에 대한 응원에 나섰다. ‘지원사격’에 힘입은 이 의원은 “임채정 의원이 지금 인신공격이란 말을 썼는데 자기와 반대의견을 말하면 인신공격이냐. 지금까지 인신공격을 해온 게 누군가”라고 재반격했다. 회의 막간에 밖으로 나온 이 의원은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신주류와의 전투의지를 불태웠다.
이윤수 의원의 뒤를 이은 것은 유용태 의원이었다. 이상수 사무총장 직전 사무총장을 맡았던 유 의원은 4·24재보선 책임론을 들고 나와 신주류를 압박했다.
유 의원은 “4·24재보선에 대한 아무런 평가 없이 넘어갔는데 이에 대해 지도부는 해명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며 “특히 사무총장은 책임을 통감하고 거취를 표명하는 것이 당원과 당무위원에 대한 도리”라고 주장, 이 총장으로부터 “일리가 있다”는 말을 이끌어냈다.
구주류의 조직적인 반발에 밀려 신당 논의가 겉돌자 이해찬 의원은 신당추진위 구성안의 기습 상정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의원은 “어제 최고위원들이 오늘 신당추진위 구성안을 상정하지 않기로 했다지만 최고위원회 논의사항은 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며 “신당추진기구 구성 동의안을 제출하겠으니 의장은 동의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주류에 의해 포위된 정 대표는 “오늘은 신당 논의만 하자”고 발을 빼 기습상정은 불발에 그쳤다.
본안 논의가 시작됐지만 신주류측은 역시 적수가 되지 못했다. 구주류 대표적 논객인 박상천 최고위원은 무려 20여 분 가까이에 걸쳐 신당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데 이어 신당을 ‘진보정당’이라며 색깔 공세까지 폈다.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 발언)에 가까운 박 최고위원의 긴 발언에 대해 천용택 의원 등이 문제 제기를 했으나 오히려 구주류의 작전에 말려들어가는 꼴이 됐다.
천 의원이 “얘기를 좀 짧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이윤수 의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이 말하는데 왜 끼어드느냐”고 힐난했다. 천 의원이 “넌 왜 나서냐”고 반말로 대응하자 이 의원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뭐야, 천용택 조심해”라고 언성을 높였고 이미 ‘함정’에 빠진 천 의원이 “너부터 조심해, 임마”라고 저항하자 이 의원 입에서는 곧장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싸가지 없게 까불어”라는 막말이 쏟아져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결국 이날 회의는 무려 4시간여 동안 계속됐으나 신주류측이 신당 창당의 당위성을 확산시켰다기보다는 구주류측에 반박의 기회만 제공한 채 기가 눌린 모습을 보였다.
구주류의 대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구주류측은 2일 당무회의 및 의원총회 연석회의를 앞두고 지난달 31일부터 다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최근 각종 언론사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민주당과 신당에 대한 지지도를 분석하는 한편 신주류에 대한 공세 수위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뿐만 아니라 연석회의에서의 역할 분담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그 결과 박상천 최고위원은 2일 연석회의를 앞두고 미리 배포한 자료를 통해 ‘신당 논의의 즉각 중단’과 ‘신당 추진세력의 탈당’을 촉구했다. 개혁신당에 대해 통합신당으로 맞섰던 구주류측이 신주류 기세를 한풀 꺾었다는 내부 평가에 따라 아예 신당논의 자체를 봉쇄하겠다고 팔을 걷어 붙인 셈이다.
이날 신주류측은 지난달 30일의 구주류측 전술을 차용, 이윤수 의원의 예결위원장 선임을 포함해 예결위 구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 기선제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한 차례 이 전술을 사용한 구주류측은 당황해하는 기색 없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신주류 이해찬 의원이 “예결위원장은 정부와 대화를 잘하고 당내 의견 수렴을 잘해야 하는데 이번 인선은 유감스럽고 합리적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균환 총무는 “이해찬 의원처럼 해박한 지식과 정치논리를 잘 내세우는 분이 할 수도 있지만 이해찬 의원은 지난번 당이 어려움을 겪을 때 (교육부 장관으로서) 정책 결정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며 이 의원의 아픈 곳을 꼬집은 뒤 “최고위원의 결정을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며 예정된 분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유감이다”고 맞받았다.
신주류가 이처럼 신당문제를 당의 공식기구에까지 끌어오는 데 성공했지만 조급함과 정치적 미숙함 등으로 구주류의 전술 전략에 말려들면서 신당 논의는 당분간 표류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런 가운데 신·구주류 양측의 강경파들을 배제하고 신당추진기구를 구성하자는 제의마저 등장하고 있어 신주류 강경파들이 희생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맞붙은 양측 사람들의 뒷편에 있던 사람들이 손을 잡는다’는 혁명사의 전례가 민주당 신당 논의에서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김영선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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