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공연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장면들. 당시 김윤석을 비롯 황정민과 조승우, 설경구 등이 열연했다. |
대학로에서 공연되는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역대 최고의 캐스팅을 선보인 작품은 다름 아닌 지난 2001년 공연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다. 94년 초연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은 현재 영화계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대거 거쳐간 무대이기도 하다.
특히 지난 2001년 공연의 캐스팅 면면을 살펴보면 김윤석 설경구 조승우 황정민 등 지금 충무로에서 수억 원대 개런티를 받는 톱배우들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당시 이들의 인지도는 어땠을까? 설경구와 조승우는 각각 영화 <박하사탕>과 <춘향전>으로 영화계에 갓 데뷔해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고 있었고, 황정민은 <와이키키브라더스>로 영화 데뷔를 앞둔 신예였다. 이들이 대중적으로 점차 인지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면, 김윤석은 영화와 드라마 출연이 전무한 대중적으로 무명에 가까운 연기자였다. 하지만 이당시 대학로 최고의 스타는 다름 아닌 김윤석이었다. 오랜 극단 생활로 인해 당시 작품의 공동 연출을 맡은 데다 광기 어린 연기로 관객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낸 다른 출연진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절대적인 톱스타였다고 한다.
당시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앞두고 신인이었던 조승우는 한 인터뷰를 통해 “매우 유명하신 선배님 한 분이 계신데 그분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고 설렌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선배 배우가 바로 김윤석인 것. 실제로 무명에 가깝던 조승우는 김윤석의 대학로 자취방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훗날 김윤석이 단역에서 명품조연으로 거듭난 영화 <타짜>에서 주연과 조연으로 재회하기도 했다. <타짜>를 계기로 충무로를 대표하는 명품조연으로 자리매김한 김윤석은 이제 주연급으로 발돋움해 오랜 연극 무대 동료인 설경구 송강호 등과 함께 충무로를 대표하는 주연 3인방으로 등극했다.
한편 연극 마니아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스타 사관학교가 있는데, 바로 연극계의 거목 오태석이 지난 84년 창단한 극단 목화다. 목화를 통해 배출된 충무로의 스타는 성지루 김수로 유해진 박희순 임원희 손병호 정은표 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유독 목화 출신들이 충무로에서 잘나가는 이유로 혹독한 가르침과 엄격한 위계질서를 꼽을 수 있다. 지난 90년 목화에 입단한 박희순은 “군대를 면제받은 차에 고생 한 번 제대로 해보자”며 목화에 들어갔음을 고백한 바 있고, 최고의 ‘명품조연’ 가운데 한 명인 손병호 역시 “목화는 들어오긴 쉬우나 호된 가르침을 버텨야만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들의 위계질서 또한 매우 엄격했다고 하는데 영화계나 방송계로 눈 돌리는 배우들은 곧장 연출가의 눈 밖에 났는데, 특히 후배가 선배보다 먼저 영화판에 진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기시돼 있었다고 한다. 배우 유해진이 연출가의 불호령이 무서워 영화 <주유소습격사건> 오디션과 촬영을 몰래 진행했던 것도 충무로에선 매우 유명한 일화다.
목화 출신 배우들은 연극계를 떠난 지금도 옛 스승과 후배들을 챙기는 마음이 각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배우 성지루는 가족 선물은 못 사도 극단 후배들 선물은 꼭 챙기는 것으로 유명한데 스케줄이 없는 날 불현듯 치킨과 맥주를 사들고 극단을 찾아 후배들의 기를 살려주기도 한다. 또한 그는 지난 2004년 목화의 창립 20주년 공연에 발 벗고 나서 무대에 올랐는데, 당시 6개월 동안의 출연료가 250만 원이었지만 그가 술값과 밥값으로 지출한 돈은 2500만 원을 넘었다고 한다.
연극계 스타들이 영화계로 진출할 때는 우여곡절도 많다. 2007년 영화 <즐거운 인생>으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김상호는 자신의 영화 데뷔작을 2004년작 <범죄의 재구성>으로 꼽지만, 실제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는 2001년작 <흑수선>이다. 그가 3년이나 먼저 찍은 영화를 애써 데뷔 작품으로 밝히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10년 이상 경력의 연극배우를 캐스팅한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가 오디션을 봐 합격했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나 정작 촬영장에 가보니 그가 맡은 역할은 탈출 포로 수십 명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고. “연극판에서 10년을 넘게 고생한 사람들이 엑스트라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며 매우 씁쓸했다”며 “당시 연극무대 연봉에 맞먹는 금액을 받아서 짭짤하긴 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연극배우들이 영화계로 쉽게 진출해선 안된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최근 예능프로그램 ‘1박2일’ 명품조연 특집에 출연해 화제를 낳은 배우 성동일 또한 한 인터뷰에서 “연극배우니까 캐스팅 매니저들이 출연료를 가지고 떠보는 일이 많았다”며 “얼마 받습니까? 100만 원, 1000만 원? 물어만 보고 연락 없는 일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또한 “길거리캐스팅도 아니고 연극배우 자존심이 다 무너지는 듯했다”며 씁쓸해 했다.
주영민 연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