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및 신체 조건 자격 미달로 정규직 전환 실패…“그가 안 되면 누가 교사 자격 있나” 여론 들끓어
중국의 대표적 SNS(소셜미디어)인 웨이보와 여러 동영상 사이트에선 최근 한 교사의 수업 장면이 ‘많이 본 뉴스’ 1위를 기록했다. 2003년부터 18년째 대산초등학교 보조교사로 일하고 있는 장셩파 씨는 인터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찾았다”고 했다.
장 씨는 두 팔이 없다. 영상에서 장 씨는 한쪽 어깨에 분필을 헝겊으로 묶고 칠판에 글씨를 쓴다. 다른 어깨엔 칠판지우개로 쓰는 알루미늄 튜브가 묶여 있다. 장 씨는 칠판에 한 편의 시를 쓴 후 학생들과 얘기를 나눴다. 이를 본 많은 누리꾼들은 감동적이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장 씨는 22세이던 1996년 불의의 사고로 두 팔을 잃었다.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이 기록적인 폭설로 전기가 끊겼다. 전기 수리공이었던 장 씨는 보수에 나섰다가 고압 전기를 맞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두 팔이 없었다. 장 씨는 치료 때문에 모아둔 돈을 다 날렸을 뿐 아니라 큰 빚을 졌다. 1997년 아내는 아들을 두고 집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몸이 불편해진 데다 모친까지 잃은 장 씨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겐 소중한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을 업고 구걸을 다녔다. 장 씨는 “희망이 없었다. 아들 때문에 버텼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렇게 여러 마을을 떠돌던 장 씨는 농사 일손이 부족했던 한 가정에 머물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 씨는 배움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장 씨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느낄 수 없었다. 제대로 살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일을 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책을 보면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장 씨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현급 마을 윈난에 위치한 대산초등학교의 유일한 선생님이 정년으로 물러나면서였다. 마을 주민들은 장 씨에게 보조교사 자리를 제안했다. 고졸 학력에 불과했던 장 씨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주민들의 제안을 결국 수락했다.
“경험도 없고 자격이 없는 내가 아이들을 망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 마을엔 젊은이가 없었다. 글을 모르는 노인과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학부모들은 농사일에 바빴다. 나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강단 위에 서기로 마음먹은 장 씨에게 가장 큰 도전은 ‘판서’였다. 두 팔이 없는 장 씨가 칠판에 글을 쓰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 씨는 “어깨에 분필을 묶고 칠판에 글을 썼다. 처음엔 힘의 조절이 되지 않았다. 힘이 세면 분필이 부러졌고, 약하면 글씨가 써지지 않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장 씨는 개학을 앞두고 매일 분필로 글을 쓰는 연습에 매달렸다. 벽, 대문, 바닥 집의 모든 곳이 그의 칠판이었다. 일주일쯤 지나니 분필로 글을 쓰는 본인만의 ‘비결’을 터득했다고 한다. 틈틈이 입으로 책을 넘기는 연습도 했다.
장 씨가 근무했던 대산초등학교는 교실 한 개와 좁은 사무실뿐이었다. 추운 겨울엔 매서운 바람으로 수업하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장 씨는 분필을 묶기 위해 교실에선 얇은 옷을 입어야 했다. 장 씨는 “겨울에 자주 동상이 걸렸다”고 했다.
대산초등학교는 장 씨 집에서 4km 떨어져 있었다. 꼬박 한 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장 씨는 “비포장도로에다가 눈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 출퇴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학교에 가다 미끄러져 옷이 성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한 번은 교장이 눈비가 오는 날엔 출근을 하지 말라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로 인해 아이들이 수업을 받지 못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이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한 학생이 기억하는 장 씨의 모습도 많은 이들을 울렸다. 대산초등학교 졸업생은 “선생님은 항상 분필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선 칠판에 최대한 가까이 가야 했기 때문”이라면서 “그럼에도 그는 칠판을 닦을 때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했다. 한 시간 수업이 끝나면 옷은 물론, 얼굴이 분필가루 투성이었다. 입안에도 분필이 한 가득이었다”고 말했다.
장 씨는 수업뿐 아니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학생들의 집도 자주 방문했다. 또 다른 졸업생은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하려 했다. 그때 선생님이 멀리서 달려와 우리 부모님을 설득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대하면서 존경했다.
장 씨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후 아이들의 성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경쟁이 치열한 유명 사립학교 입학생들도 배출했다. 졸업생들의 기부가 늘면서 학교 상태도 좋아졌다. 하지만 장 씨의 보수는 그리 많지 않다. 처음 165위안(3만 원가량)이던 그의 월급은 지금도 1500위안(27만 원)에 불과하다. 여전히 보조 교사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문을 들은 학교들이 고액의 영입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산초등학교 아이들을 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장 씨가 전국적인 화제를 모으게 된 것은 최근 정규 교사직 전환이 무산되면서다. 18년간 보조교사로 일했던 장 씨는 학교장과 마을 주민들의 추천 등에 힘입어 정규직 전환을 신청했다. 하지만 교육 당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정규직 전환에 필요한 시험 응시 나이가 35세까지다. 또 교사 자격에 ‘판서에 영향을 주는 장애가 있을 경우 검진 불합격’이라는 항목이 있다는 점도 장 씨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자 여론이 들끓었다. 한 누리꾼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사가 불합리한 규정으로 정규직 전환이 좌절됐다”면서 교육 당국을 비판했다. 대산초등학교 교장도 “아이들에 대한 헌신과 애착을 감안할 때 물러날 수 없다. (정규직 전환을) 계속 신청할 것”이라고 했다. 대산초등학교 졸업생이라고 밝힌 한 졸업생은 자신의 블로그에 “장셩파가 안 된다면 도대체 누가 교사 자격이 있다는 것이냐. 18년간 헌신한 장셩파에 대해선 특별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정규직 교사로 전환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배경화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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