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오하이오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존 홈즈의 유년기는 행복하진 못했다. 철도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로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홈즈가 두 살 때 어머니는 재혼했지만 그 또한 주정뱅이였고 폭력적이었다. 결국은 2년 후에 갈라선 홈즈의 어머니는 세 번째 남편을 만난다. 착한 남자 같았지만 의붓자식들은 거들떠도 안 보았고 사춘기였던 홈즈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힘도 셌던 홈즈는 저항했고 계부는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 사건 이후 홈즈는 학교를 그만두고 16세에 군에 지원해 독일에서 복무한다. 제대 후 LA로 돌아온 그는 앰뷸런스 운전 일을 하다가 만난 간호사 샤론 게비니니와 21세에 결혼한다. 육류 운반 일을 하던 그는 폐병을 앓았고 회복한 후엔 카드 클럽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때 화장실에서 일을 보던 그의 거대한 페니스를 우연히 목격한 어느 사진작가는 그에게 포르노 일을 권했고, 그는 가끔씩 8㎜ 필름으로 만든 단편 포르노에 출연한다. 1966년, 스물두 살 때였다.
1971년에 시작된 ‘자니 워드’ 시리즈는 존 홈즈를 단숨에 ‘포르노 킹’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사립탐정 캐릭터로 등장하는 존 홈즈는 액션과 섹스를 결합한 포르노의 주인공이었다. 1970년대는 그의 시대가 되었고 1978년엔 하루에 3000달러를 버는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존 홈즈의 삶엔 검은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약은 가장 큰 적이었고 한참 코카인에 빠져 있을 땐 발기가 되지 않았다. 1980년에 찍은 <만족시킬 수 없는(Insatiable)>엔 그의 축 늘어진 페니스가 애처롭게 등장하기까지 했다.
마약 중독은 범죄와 연결됐다. 당시 그는 원더랜드 갱단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마약 관련으로 돈을 빼돌리다 곤경에 처했다. 무죄로 풀려났지만 존 홈즈의 범죄 경력은 끊이지 않았다. 마약 살 돈을 벌기 위해 좀도둑질을 했으며 남창이 되기도 했다. 16세 가출 소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악행과 무관하게 그의 명성은 전설이 되어갔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크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는 가운데 <스크류>라는 잡지는 그의 크기가 32㎝라는 발표를 했고, 그의 아내인 샤론에 의해 25㎝에 둘레가 10㎝이라고 전해지기도 했다. 거의 모든 포르노 남자 배우와 관계를 맺었던 베테랑 여배우 ‘세카’는 “홈즈 것이 가장 크다”고 공언했고, 평생의 매니저였던 빌 에머슨은 34㎝라고 했다. 한편 홈즈 스스로는 38㎝라고 주장했다.
“과연 존 홈즈는 완전히 발기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논쟁도 있었다. 그의 물건이 너무 커서 100퍼센트가 발기가 불가능했다는 것. 그래서일까? 공연했던 여배우들은 홈즈의 페니스가 그다지 딱딱하지 않았다며 “마치 부드러운 수세미와 섹스하는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마약과 범죄로 시달리던 그는 1980년대에 급격하게 하락한다. 게다가 1983년에 출연한 게이 포르노에서 홈즈는 HIV 보균자인 조이 예일과 관계를 맺으며 그 또한 보균자가 되었다. 1986년 이후엔 미국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고, 결국 이탈리아로 건너가 치치올리나와 포르노를 찍었다.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한 인터뷰이는 이렇게 말한다. “포르노 산업에서 존 홈즈는 로큰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존재였다. 그는 ‘왕’(The King)이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범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던 ‘불안한 황제’였으며, 자신이 HIV 보균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계속 섹스를 했던 비윤리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결국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한 줌의 재가 되어 캘리포니아 해안에 뿌려진 존 홈즈. 그의 이름엔 ‘포르노 스타’라는 존재가 지닌 모든 영욕이 깃들어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