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남짓한 활동 기간에 출연 편수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줄리엣 앤더슨은 미국 포르노그래피 역사에서 손꼽히는 여걸이다. 포르노 여배우로선 이미 은퇴할 나이인 40세에 데뷔한 그녀는 독창적인 캐릭터와 열정적인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욕정에 찬 중년 여성’의 표상. 감독과 제작자로서 재능을 발휘했고,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펼쳤던 여성이었다.
1938년 캘리포니아의 버뱅크에서 태어난 그녀의 출생명은 주디스 카. 아버지는 재즈 트럼펫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단역 배우였다. 그녀의 부모는 매우 금슬이 좋았고 원만하며 왕성한 성 생활을 즐겼는데, 이것은 이후 그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 줄리엣은 크론병으로 긴 시간을 병실에서 보냈다. 21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것도 그런 이유. 하지만 영민했던 그녀는 ‘올 A’로 학업을 마쳤고,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중퇴하고 애인이었던 해군 사병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들은 결혼했지만 곧 이혼했다.
그녀가 포르노와 인연을 맺은 건 광고 일을 하던 때였다. 이때 만난 포르노 제작자 알렉스 드 렌지는 당시 다큐 스타일이 가미된 혁신적인 성인영화로 큰 성공을 거둔 업계의 개척자. 새로운 여배우를 찾던 그녀는 예쁘면서도 지적인 줄리엣 앤더슨에게 매혹되었고, <프리티 피치 Pretty Peaches>(1978)라는 영화를 제안한다.
싱싱한 육체를 과시하는 젊은 여배우들 틈에서 줄리엣 앤더슨은 조연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핸디캡에서 장점으로 바꾼다. 그 계기가 된 작품은 <페그 아줌마 Aunt Peg>(1980). 그녀는 ‘빅 사이즈’의 대명사 존 홈즈와 섹스 신을 벌이는데, 이때 누군가가 이런 대사를 던진다. “오, 페그 아줌마! 그 남자 물건이 정말 크네요!”
이후 ‘페그 아줌마’는 미국 포르노그래피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가 되었다. 성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위험한’ 중년인 페그 아줌마. 그녀는 영화 속에서 결국은(!)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된다.
늦은 나이에 출발했지만 줄리엣 앤더슨이 각광 받을 수 있었던 건 그 진정성에 있었다. 그녀는 연기 중에 항상 실제로 오르가슴을 느꼈다. 그리고 섹스에 통달한 듯한, 농익은 중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마음껏 발산했다. 글래머도 아니고 테크닉이 뛰어나지도 않았던 그녀가 스타덤에 오를 수 있던 이유였다.
오로지 남성들만 포르노를 연출했던 시절, 시나리오부터 메이크업까지 모든 분야에 다재다능했던 그녀는 1981년에 첫 연출작 <킹스 레이디>를 내놓으면서 금기를 깼다. 이후 니나 하틀리라는 불세출의 여배우를 발굴해 <니나 교육시키기>(1984)라는 야심작을 내놓았지만 제작자가 마음대로 편집해 작품을 내놓자, 그녀는 포르노 업계를 떠났다.
1995년에 다시 포르노 업계로 돌아온 그녀는 1998년, 환갑의 나이에 <나이를 먹지 않는 욕망>이라는 영화에서 50대 이상 남녀의 성생활을 하드코어 포르노 속에 담아낸다. 이후 커플 카운슬러로 일하며, 섹스 트러블에 대한 조언을 담은 책들을 저술했다.
평생 클론병으로 고생했고 결국 그 병으로 2010년 7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줄리엣 앤더슨에게 섹스는, 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었다. 그는 섹스를 통해 생겨나는 엔도르핀의 치유 효과를 믿었다. 감독이 “컷!”을 외친 후에도 섹스 신의 여운을 느끼며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던 줄리엣 앤더슨. 그녀는 섹스를 통해 몸을 해방시키려 했던, ‘포르노의 아줌마 여전사’였던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