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후 포르노 역사를 이야기할 때 니나 하틀리라는 이름은 빼놓을 수 없다. 지난 주 소개한 줄리엣 앤더슨에 의해 발굴된 그녀는, 포르노를 단순한 남성적 쾌락의 매체가 아닌, 적극적인 여성 육체의 장으로 여기는 인물이다.
1959년에 앨라배마에서 태어난 그녀가 성장한 곳은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그녀는 미국 사회가 섹스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를 지녔던 마지막 시대인 1970년대에 사춘기를 겪었다. 그녀는 베티 닷슨의 <섹스 포 원>, 루이스 컴포트의 <섹스의 즐거움>, 자비에르 홀랜더의 <행복한 창녀> 같은 책을 잃으며 각성해갔다. 즐겨 읽던 잡지는 <플레이보이>였다.
17세 때 처음으로 포르노를 보았고 18세 때 첫 경험을 했던 그녀는 나름의 성적 깨달음을 얻었다. 여성은 자신의 쾌락에 대해 통제권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이 성적으로 원하는 것에 대해 파트너와 소통해야 하며 여성에게 남성이 쾌락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섹스는 남자가 여성에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섹스는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취하는 것도 아니다. 섹스는 여성이 열정을 가지고 뛰어드는 것이다.”
1983년에 결혼한 남편 데이브(2000년에 이혼)를 통해 알게 된 줄리엣 앤더슨은 니나 하틀리에게 포르노 출연을 제안했다. 니나가 용기를 내서 출연한 첫 영화 <니나 교육시키기>(1984)가 엄청난 성공을 기록하면서 그는 이후 8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빼어난 미인이나 글래머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어필했고, 특히 엉덩이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1997년에 할리우드 영화 <부기 나이트>에 섹스 중독자인 포르노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1996년부터 시작된 섹스 교육 시리즈는 하틀리의 브랜드. <니나 하틀리의 …가이드>라는 제목을 달고 시리즈로 출시되었는데 섹스의 기초부터 전희와 애널 섹스와 밴디지까지 망라하는 거대한 ‘실전 섹스 가이드’였다. 섹스의 긍정적인 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였던 하틀리는, 포르노 산업의 존재 이유에 대한 열정적인 주창자였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을 때는 여성 방청객들과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을 정도. 지난해엔 뉴질랜드에서 동료 여배우들과 함께 포르노의 자유를 위한 토플리스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하틀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건 자연스럽게 성적 자유를 실천했던 그녀의 삶. 양성애자인 그녀는 동료 배우들과 숱한 연인 관계를 맺었는데 론 제레미나 해리 림즈 같은 전설의 배우부터 세카나 린저 린 같은 일대를 풍미한 여배우까지, 인종과 성별을 불문하고 20여 명의 포르노 배우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굳이 사랑이 수반될 필요는 없는, 쾌락 그 자체로의 섹스를 원했다. 결혼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20여 년 동안 남성과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만(2003년에 SM 컨셉트 전문 감독인 어니스트 그린과 결혼), 그녀는 상대방의 합의하에 여성 파트너도 함께 사는 ‘3자 결혼’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각자의 성 정체성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대안적이면서도 파격적인 관계지만, 하틀리에겐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이었다.
니나 하틀리에게 포르노그래피는 생계의 수단 이전에 일종의 소명이었다. 그녀는 다소 덜 만족스러운 섹스라 할지라도 섹스를 통해선 반드시 배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섹스 전도사’ 하틀리는 2006년에 <완전한 섹스를 위한 니나 하틀리의 가이드>라는 책에서 그 모든 것을 집대성하며 충만하고도 진정성 있는 성 생활을 전하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