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 나온 제나 제임슨의 자서전 <포르노 스타처럼 섹스 하는 법>을 보면 그녀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스무 살 무렵의 청춘기는 꽤나 우울하고 고통스러웠다. 1974년 라스베이거스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경찰, 어머니는 쇼걸이었다. 제나가 두 살 때 어머니는 피부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암 치료 때문에 파산한 그녀의 가족은 집 없이 트레일러를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그녀는 엄청난 비극을 겪는다. 히치하이킹을 하던 중 만난 네 명의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한 것. 몇 달 후 어느 목사에게 또 다시 강간을 당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열여섯 살, 제나는 그 충격으로 가출한다.
타투 아티스트인 남자친구와 동거하면서 제나는 어머니처럼 쇼걸이 되려고 오디션을 봤지만 당시 쇼걸의 평균 신장이었던 173㎝에 5㎝ 모자라는 키로 떨어졌다. 미성년자였지만 신분증을 위조해 라스베이거스의 어느 클럽에 스트리퍼로 취직한 그녀는 누드 화보 모델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녀는 각종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마약을 멀리하며 조금씩 몸을 추스르던 제나는 1993년에 소프트코어 성인 영화에 출연했고 1994년에 성형 수술로 만든 D컵 가슴으로 등장한 <업 앤 커머스(Up and Cummers)> 시리즈를 통해 하드코어의 세계에 들어선다. 1995년엔 위키드 픽처스와 독점 계약을 맺었는데 스티브 오렌스타인 사장은 그녀에게 “미국 포르노 산업 사상 가장 위대한 스타가 되라”며 격려했다.
1996년에 그녀는 정상에 선다. 미국 포르노 산업의 3대 시상식인 XRCO와 AVN 시상식과 FOXE 비디오 빅센 어워드에서 모두 신인상을 수상한 것. 이후 그녀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2001년엔 하루 촬영에 6만 달러를 받으며 DVD 수익의 절반을 가져가는 톱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 시기 스트립 클럽에서 하룻밤 공연하면 2만 5000달러를 받았다. 그는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포르노 배우가 된 것.
2000년에 우크라이나 출신의 동료 배우 제이 그르디나와 ‘클럽제나’(ClubJenna)를 설립하면서 제나 제임슨은 본격적인 비즈니스의 길로 접어든다. 유료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인터넷 사이트로 시작해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 제임슨은 2003년에 뉴욕 한복판인 타임 스퀘어에 15미터 길이의 광고판을 내걸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6년에 감독으로 데뷔한 그녀는 플레이보이 TV에서 포르노 배우의 등용문인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나의 아메리칸 섹스 스타>를 진행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이후 ‘클럽제나’는 1년에 3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두는 기업으로 발전했다. 그녀는 엔터테인먼트의 거의 전 분야에 진출했다. <버츄얼리 제나(Virtually Jenna)>라는 비디오 게임은 캐릭터가 된 제나를 오르가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이용한 핸드폰 벨 소리가 생겼고 향수와 핸드백과 란제리에도 제나 제임슨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2005년엔 ‘베이브 카바레’라는 스트립 클럽까지 만들었다.
“포르노 배우가 되면 모든 남자들이 나와 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생계를 위해 이 일을 할 뿐이다. 나는 아무나 내 팬티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제나 제임슨은 2007년에 가슴의 보형물을 제거하며 C컵으로 돌아왔고 2008년에 배우 은퇴 선언을 했다. 두 번의 결혼 생활을 통해 그토록 아이 갖기를 원했지만 실패했던 그녀는 2009년 남자친구인 전직 UFC 챔피언 티토 오르티즈와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