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월화드라마 <미스 리플리>에 출연한 배우 강혜정의 출연 분량 논란을 두고 한 외주 제작사 대표는 말했다. A급 배우에게 그에 걸맞은 개런티를 주며 캐스팅할 때는 회당 ‘10초’만 노출시킬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 배우 역시 아무리 많은 출연료를 줘도 출연 분량 없는 배역은 맡지 않는다. 강혜정의 출연 분량 논란에는 양측 모두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양측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강혜정이 방송 초반부터 비중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항간에는 “강혜정이 대본을 임의대로 수정해 연기했다”는 말도 나돌았다. 때문에 제작진에 밉보인 강혜정의 분량이 줄어들었다는 것. 반면 제작진이 이다해 박유천 등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은 인물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강혜정과 불화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무성하다. MBC의 한 관계자는 “막판 조연이었던 김정태의 출연 분량이 급격히 늘어 난 것을 보면 결국 제작진이 ‘되는 배우’를 밀어 준 것이라는 추측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정확한 속내는 말하지 않은 채 평행선을 그었다”고 설명했다.
<미스 리플리>에서 강혜정과는 달리 자신의 분량을 톡톡히 챙긴 이다해. 하지만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다해 역시 지금의 강혜정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적이 있다. 당시 MBC 시대극 <에덴의 동쪽>에 출연 중이던 이다해가 돌연 하차를 선언하면서 사건이 불거졌다.
하차설이 나돌 때만 해도 이다해의 소속사는 “작가 교체 등으로 힘들어 할 뿐 제작진과 불화는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다해가 <에덴의 동쪽>의 홈페이지를 통해 직접 입장을 밝히며 사건은 일파만파 번졌다. 이다해는 “저의 역할이, 이유 없는 자기답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바보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며 캐릭터 묘사 및 출연 분량에 대한 불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당초 이다해는 언론사 사주의 딸로 출연해 주인공인 송승헌과 연정훈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루는 인물로 설정됐다. 하지만 송승헌-이연희 커플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출연 비중이 급격히 늘었다. 이다해가 설 곳은 더욱 좁아졌다.
이외에도 <아테나:전쟁의 여신>의 수애, <도망자 플랜B>의 이정진, <인생은 아름다워>의 남상미 등이 출연 분량 문제로 한 차례씩 곤욕을 치렀다. 남상미의 경우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집필을 맡은 김수현 작가까지 나서 “나라는 사람은 기분이 상하면 그냥 캐스팅에서 제외하는 쪽이지 함께하면서 골탕 먹이는 짓 같은 건 이 나이 먹도록 해본 적이 없고 죽는 날까지 그런 짓은 할 수가 없는 캐릭터입니다. 긴 호흡의 드라마입니다. 그걸 이해하고 봐주시고, 일할 때마다의 출연진은 모두 한 가족이고 형제고 새끼입니다. 특별히 미운 짓만 안하면 모두 고맙죠”라고 해명했다.
배우들의 출연 분량 논란은 비단 드라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매주 출연 분량을 확인할 수 있는 드라마와 달리 최종 편집본만 보게 되는 영화의 경우 더욱 극단적인 편집이 이뤄질 수도 있다.
2008년 개봉된 영화 <비스티 보이즈>. 호스트들의 세계를 다룬 이 영화는 배우 윤계상과 하정우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하지만 시나리오 단계에서 두 배우의 비중 차이는 현격했다. 군 전역 후 영화 <6년째 연애중>과 드라마 <누구세요> 등의 주연배우를 맡은 윤계상은 <비스티 보이즈>에서도 중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비스티 보이즈>의 언론시사회가 끝난 후 반응은 급변했다. 두 사람의 출연 분량은 비슷해졌고 “하정우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정우가 촬영한 부분은 대부분 최종본에 반영된 반면 윤계상의 출연 분량은 30% 이상 잘려 나갔다. 당시 <비스티 보이즈>의 제작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두 배우의 연기력을 비교하기 전에 하정우가 맡은 캐릭터 자체가 더 힘이 있었다. 감독 역시 고민이 많았겠지만 영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 역시 하정우의 손을 들어줬다. <비스티 보이즈>의 프리 프러덕션 단계인 2007년만 해도 하정우는 그냥 ‘연기 잘하는 평범한’ 배우였다. 하지만 2008년 2월 개봉된 <추격자>가 크게 성공하면서 하정우의 위상은 달라졌다. <추격자> 개봉 후 불과 2개월 만에 ‘하정우의 차기작’이라고 소개된 <비스티 보이즈>에서 하정우의 분량을 늘리는 것은 제작진으로서는 ‘성공 전략’이었을 것이다.
출연 분량이 아예 ‘통편집’된 경우도 있다. 아역 배우 서신애는 2007년 초 MBC 드라마 <고맙습니다> 출연 이후 ‘천재 아역’이라 불리며 영화 <내 사랑>에도 캐스팅됐다. 홍보 과정에서도 서신애의 출연은 큰 이슈였다. 정작 연말 열린 <내 사랑>의 언론시사회에서는 서신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다섯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서신애의 출연 분량이 통째로 편집된 것. 당시 제작사는 “러닝타임이 길어 편집이 불가피했다”고 해명했다. 서신애 측이 “영화를 위해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주연급 성인 배우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지난해 개봉된 공포 영화 <고사2>는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출연 이후 상종가를 달리던 황정음과 배우 김수로를 주연 배우로 홍보해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황정음과 김수로는 주연이 아닌 조연 배우인데 홍보를 위해 이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다. 이런 홍보 전략 덕에 개봉 첫 주 5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이후 관객들의 실망 섞인 반응이 나오며 관객이 급감해 최종 스코어는 80만 명에 머물렀다. 황정음과 김수로를 보러왔던 관객들에게는 일종의 ‘배신’이었던 셈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 영화 관계자는 “출연 분량을 두고 배우와 제작진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한다. 납득할 만한 비중과 출연 분량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디서건 불만이 터져 나온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