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 시절 스크린을 휘감던 에로티시즘의 화신이었던 티더 배러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평범한 소녀일 뿐이었다. 부모는 모두 유태인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재단사였다. 1885년 테오도시아 굿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연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다가 무작정 뉴욕으로 향한다.
블론드를 검게 염색한 그녀는 힘든 시간을 견딘 후 1908년에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아직 캘리포니아에 할리우드가 만들어지기 전 뉴욕은 미국영화의 중심지였고 영화계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티더 배러는 1914년에 첫 영화 <더 스테인(The Stain)>을 찍지만 단역이었다. 다음 해 조연으로 등장한 <어 풀 데어 워즈(A Fool There Was)>(1915)에서 남자를 유혹해 파멸시키고 그의 재산으로 살아가는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는 티더 배러가 가야 할 길을 정해주었다. 그녀에겐 뱀파이어의 줄임말인 ‘뱀프’(The Vamp)라는 닉네임이 붙었고, 이 단어는 미국 문화에서 ‘성적인 공격성을 띤 여성’, 즉 ‘요부’라는 의미의 단어로 통용되었다.
티더 배러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홍보 전담 부서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케팅에 의해 조작된 최초의 스타가 되었다. 스튜디오는 티더 배러가 이국적 이미지로 어필하길 바랐고 신시내티 재단사의 딸인 티더 배러를 아랍 족장과 프랑스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홍보했다. 혹은 이탈리아 조각가와 프랑스 여배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사하라 사막에서 성장했고 프랑스에서 연극배우로 데뷔했다는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이집트는 물론 프랑스도 가 본 적이 없었던 티더 배러는 단숨에 엑조티즘의 화신이 되었다. ‘나일강의 독사’(Serpent of the Nile)라는 별명이 붙었고 초자연적인 힘마저 지닌 걸로 알려졌다. 당시 그녀가 받았던 주급은 4000달러로 찰리 채플린이나 메리 픽포드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클레오파트라>(1917)는 최고의 흥행작이었고 카르멘이나 살로메 같은 ‘쎈’ 캐릭터는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이국적 이미지의 ‘바람난 여자’(wanton woman). 티더 배러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판다를 연상시키는 눈 화장에 굶주린 듯한 눈빛, 짙은 립스틱과 화려한 드레스, 동양적 느낌의 장신구와 모호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여기에 티더 배러는 또 하나의 도발을 감행했다. 가슴만 겨우 가리고 상반신을 드러낸 그녀의 노출 수위는 100년 가까이 지난 21세기 기준으로 봐도 외설적인 수준이었다. 할리우드가 극도의 보수주의에 접어드는 1930년대였다면 검열에 의해 당연히 금지되었을 시도였다. 그런 이유로 후대 사람들은 그녀를 영화사상 최초의 섹스 심벌로 추앙했다.
요부 이미지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티더 배라는 그 이미지 속에서 신음했다. 고정된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로미오와 줄리엣>(1916)에서 줄리엣 역을 맡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건 딱 한 가지, 극도로 섹슈얼하고 한계를 넘는 유혹의 매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결국 배러는 1919년 20세기 폭스와의 5년 계약을 끝내고 새로운 길 위에 선다.
전속 계약을 끝내고 1921년에 영화감독인 찰스 브래빈과 결혼하면서 티더 배러는 하향세에 접어든다. 결국 그녀는 41세의 나이에 자신의 요부 이미지를 패러디한 영화 <마담 미스터리>(1926)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955년 70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뱀과 해골을 휘감고 카메라 앞에 서고 착한 남자를 비극에 처하게 하는 섹시하면서도 천박한 매력의 유혹녀. 하지만 정작 그녀는 서점을 즐겨 찾는 조용한 여성이었고 “나는 뱀파이어의 얼굴을 지녔지만 페미니스트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알찬 속을 지닌 배우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