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에서 ‘윤인자’라는 이름은 그녀가 50년 넘게 활동하며 은막에 아로새겼던 수많은 캐릭터나 힘들게 살아왔던 기구한 인생보다, ‘최초의 키스 신’이라는 수식어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데뷔작 <운명의 손>에서 여간첩으로 등장한 뒤, 대담한 여장부이며 신여성으로 앞서갔던 윤인자는 최은희와 함께 한국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올해 5월 한 노배우가 자서전을 출간했다. 89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강한 인상의 여배우, 바로 윤인자였다.
192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윤인자(본명 윤인순)는 어릴 적 어느 떡장수 집 양녀로 들어간다. 12세 때 사리원의 권번(기생 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평양의 바에서 여급 생활을 했고, 서울 국일관에서 기생 생활을 거쳐 19세 때에 중국 하얼빈의 ‘태양 악극단’에서 본격적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유치진의 <소>에서 주연을 맡아 만주 순회공연을 하던 중 광복을 맞이한 그녀는 월남해 연극 <홍도야 우지 마라>의 여주인공이 되었고, 1950년엔 <황진이와 지족선사>에서 황진이 역으로 공연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1952년엔 한국 최초의 음악 무용극 <처용의 노래>에서 주연을 맡은 그녀는 이후 영화계에 진출했고, <운명의 손>(1954)은 첫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여간첩이자 술집 마담 마가렛 역을 맡았다. 진한 프렌치 키스도 아닌 5초 동안의 입맞춤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일으킨 파란은 대단했다. 그 5초는 유교적 윤리 관념과 미군 문화가 충동하던 전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함축하는 ‘상징적 찰나’였다. 남편 입회하에 촬영되었지만 개봉 후 그 장면이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이혼 직전까지 가는 위기(?) 상황에 처했다. 윤인자의 신여성 이미지를 다시 한 번 확고히 드러냈던 캐릭터는 <전후파-아프레겔>(1957)의 리라. ‘아프레겔’은 ‘아프레 게르’(après-guerre), 즉 ‘전후 세대’라는 뜻으로 이 영화 이후 한국에선 ‘아프레 걸’로 통용되며 기존의 관습과 단절한 자유분방한 여성, 특히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윤인자가 맡은 ‘리라’라는 캐릭터는 그 전형으로, 유부남을 유혹해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는 일종의 ‘악녀’였다.
데뷔 초부터 A급 배우로 스타덤에 올랐던 그녀의 필모그래피가 더욱 뻗어나가지 못했던 건, 어쩌면 한국 사회의 보수성 때문이었다. 한국영화에서 여성이 맡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역할이 현모양처였던 1950~60년대, 그녀는 <옥단춘>(1956)의 기생이나 <빨간 마후라>(1964)의 마담 같은 가정이 배제된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타입 캐스팅에 갇히기엔 윤인자에겐 좀 더 복합적이며 강인하며 독특한 이미지가 있었다. 영화평론가 변재란은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그 여자의 일생>(1957)에 출연한 윤인자를 분석하며 “그에게는 고분고분하거나 운명에 수동적으로 굴복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연기가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윤인자를 이야기할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건 자유로운 삶이다. 연극 <홍도야 우지 마라> 때 만난 테너 민영찬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던 그녀는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가수 현인과 동거하기도 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해군 참모였던 루시 대령과의 관계도 그녀의 자서전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에 등장한다. 전쟁 후 부임한 루시 대령은 당시 한국 해군을 좌지우지했던 실력자.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은 윤인자를 루시 대령에게 소개했고 윤인자는 그의 현지처로서 1년 6개월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스스로를 ‘최후의 관기(官妓)’라고 표현하는 그녀의 희생으로 당시 한국 해군의 시설과 훈련 체계는 파격적인 개선을 이룰 수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녀를 “대한민국의 꽃”이라는 칭하기도 했다.
이후 극단 신협 때 만난 민구와 결혼했지만 헤어졌고 가수 고운봉과의 결혼도 오래 가지 못했다. 1976년엔 속리산 수정암에 출가했지만 1978년에 환속한 그녀는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다가 1989년에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노스님 역을 맡아 대종상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최근작은 1999년에 출연한 신승수 감독의 <얼굴>. 아직도 카리스마 넘치는 노배우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