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절리나 졸리와 연기 호흡을 맞춘 <오리지날 씬>. |
<환상의 그대> 같은 최근작을 보면, 매너 좋고 매끈한 실장님 캐릭터도 곧잘해내지만,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본질’은, 격정적이고 거칠며 에로틱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1960년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에서 경찰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호세 안토니오 도밍게스 반데라스는 어린 시절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14세 때 다리 부상을 입으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그의 두 번째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우연히 뮤지컬 <헤어>를 본 그는 연극 학교에 들어가 10대 시절부터 무대에 섰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은 독재 시절이었고, 소극단의 정치적인 연극 내용이 문제가 되어 종종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19세 때 그는 마드리드의 중앙 연극 무대로 진출한다. 웨이터와 모델 일을 하면서 스페인 국립극단의 막내 단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바로 페드로 알모도바르. “처음 본 순간 나는 그가 배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는 알모도바르는 반데라스를 영화계로 이끌었고, <정열의 미로>(1982)에서 그는 게이이며 이슬람교도이며 테러리스트인 사덱 역을 맡는다.
이후 반데라스는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자 섹슈얼리티의 화신이 된다. 알모도바르와 두 번째로 함께한 <마타도르>(1986)에서 앙헬 역을 맡은 그는 투우를 배우는 학생인데, 스승의 연인을 강간한 후 경찰에 자수하면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연쇄살인의 범인임을 털어놓는다. 세 번째 함께한 <욕망의 법칙>(1987)에선 자신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깨달은 이성애자로 등장, 동성 파트너를 죽이고 자살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1988)에 이어 알모도바르와 다섯 번째 작업인 <욕망의 낮과 밤>(1990)에선 포르노 여배우를 납치한 정신병자로 등장한다.
알모도바르의 작업을 통해 반데라스는 경력 초기의 성적 이미지를 굳힌다. 스토커, 강간범, 사디스트, 동성애자…. 이른바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성 정체성과 거리가 있는, 음울하고 극단적이면서도 섹슈얼한 이미지. <바톤 루즈>(1988)의 지골로 역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마돈나의 <진실 혹은 대담>(1991)에선 그녀의 성적 대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반데라스를 발굴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를 할리우드에 뺏긴 것을 가장 큰 아픔으로 여긴다”는 알모도바르의 <하이 힐>(1991) 제안을 뒤로 하고, 그는 할리우드의 러브콜에 응한다. 미국에서의 첫 작품은 <맘보 킹>(1992). 영어에 서툴러 의미도 모른 채 외운 대사로 연기를 한 이 영화 이후, 할리우드에서 반데라스의 성적 이미지는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그는 라틴 스타일로 어필한다. 그는 전형적인 ‘헝크’(hunk), 즉 ‘성적 매력을 지닌 섹시한 남자’였는데, 위노나 라이더와 공연했던 <영혼의 집>(1993)에 이어 <데스페라도>(1995) 같은 액션 영화 그리고 결정타가 되는 <마스크 오브 조로>(1998)의 조로 역은 그의 이런 이미지를 상업화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반데라스는, 알모도바르에 의해 만들어진 섹슈얼한 이미지를 할리우드에서 이어간다. 비록 조연이었지만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에 절대로 밀리지 않았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에선 뱀파이어들의 보스가 되었고, <필라델피아>(1993)에선 톰 행크스의 동성 연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위험한 육체’였던 반데라스는 할리우드에서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한다. 흥행에 참패했던 <13번째 전사>(1999) 이후 <스파이 키드> 시리즈나 <엑스 대 세버>(2002) 등은 반데라스가 점점 평범한 배우가 되는 과정이었고, <오리지날 씬>(2001)이니 <팜므 파탈>(2002) 같은 아찔한 영화도 있었지만, 이 영화들에서의 반데라스는 예전 같지 않았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에서 만난 아나 레자와 1987년에 결혼해 1996년에 헤어진 그는 멜라니 그리피스와 그 해에 결혼해 현재까지 잉꼬 부부로 살고 있는 중.
한편 겉모습과는 달리 반데라스는 에로틱한 장면에서 꽤나 부끄러움을 탄다고 하는데, <오리지날 씬>에서 앤절리나 졸리와 찍었던 섹스 신은 대표적. 졸리는 당시를 회상하며 “반데라스는 머리와 달리 몸이 흥분할까 신경을 곤두세웠고, 결과적으로 뭐 하나 제대로 해볼 수가 없었다”며, “그는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 사람들이 이 섹스 신을 보면서 ‘반데라스도 한때 섹시한 라틴계 배우였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