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어졌지만 <무비라인>이라는 미국의 영화잡지에서 ‘영화사상 가장 유혹적인 장면’을 선정한 적이 있었다. 여기엔 몇 편의 고전 영화가 언급되었다. 그레타 가르보가 당시 실제 연인이었던 존 길버트와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육체와 악마>(1926), 마를렌느 디트리히의 중성적 매력이 화면을 가득 채우던 <모로코>(1930), 리타 헤이워드가 아찔한 각선미를 보여주던 <길다>(1946) 등등이 바로 그 유혹적인 장면의 영화들이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소유와 무소유>(1944)다. 뻔뻔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위스키 한 잔 걸친 듯한 목소리의 소유자 로렌 바콜과 무뚝뚝하고 터프한 사나이 험프리 보가트. 바콜은 살롱의 관능적인 가수로 등장하고 보가트는 비정한 마도로스다.
보가트에게 빠진 바콜은 자신이 얼마나 몸이 달아 있는지 알리는 쪽지를 그에게 보내고 그의 호텔 방문에 지키고 서 있다가 말한다. “그저 휘파람을 불어주세요. 입술을 모으고 숨을 내뱉는 거예요.” 불멸의 키스신이었고, 촬영 당시 18세였던 로렌 바콜에게 이 영화는 데뷔작이었다.
1924년에 태어난 로렌 바콜은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다섯 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연기 학원을 마친 그녀는 17세 때 브로드웨이 무대에 설 수 있었고 이후 모델 생활로 생계를 이었다. <하퍼스 바자> 표지 모델은 그녀가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 계기. 당대의 명감독이었던 하워드 혹스의 아내 낸시 혹스는 잡지를 본 후 남편에게 바콜을 추천했고 이후 바콜의 매너부터 패션까지 총괄하는 멘토가 된다. 남성적이었던 바콜의 목소리를 섹시하게 바꾼 사람도 바로 낸시였다.
혹스 감독의 <소유와 무소유>로 데뷔했을 때 현장에서 그녀는 무척 떨었다. 그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턱을 가슴에 바짝 당겼는데 연기를 하기 위해선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어야 했고, 그 결과 눈을 치켜뜨게 되었다. 이 모습은 ‘더 룩’(The Look), 즉 ‘시선, 눈길’이라는 닉네임을 낳게 되었고 이러한 도발적인 모습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소유와 무소유>가 그녀에게 안겨 준 가장 큰 선물은 상대역인 험프리 보가트였다. 당시 세 번째 아내 메이요 메소트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보가트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바콜에게 급속도로 빠져 들었고, 바콜 또한 스물다섯 살이나 나이가 많은 아버지 같은 남자 보가트에게 사랑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던 그녀의 콤플렉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바콜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사랑에 빠지고 말 거다.” 보가트와 바콜은 두 번째로 함께 한 영화 <빅 슬립>(1946) 촬영이 끝나자 결혼식을 올렸고 40대 중반이었던 보가트는 생애 첫 아이를 바콜과의 사이에서 얻는다.
그녀의 전문 분야는 팜므 파탈이었다. 한참 누아르 영화가 쏟아지던 1940~50년대 그녀만큼 이 장르에 잘 어울리는 얼굴을 가진 여배우는 찾기 힘들었다. 각진 얼굴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누아르의 콘트라스트 강한 조명 아래서 조각상처럼 보였고 섹시하면서도 음산한 느낌은 안성맞춤이었다. 할리우드 사상 가장 매력적인 목소리 중 하나로 꼽히는 허스키 보이스도, 그녀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컬러 영화로 넘어오면서 마릴린 먼로와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같은 코미디에 출연하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바람 위에 쓴 편지>(1956) 같은 편집증적인 중산층 멜로 드라마였다. 하지만 1957년에 보가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의 삶과 영화 경력은 서서히 침잠하기 시작한다. 프랭크 시내트라와 잠시 염문이 있었고 배우인 제이슨 로바즈와 재혼하기도 했지만(8년 만에 이혼), 보가트의 죽음은 채울 수 없는 공백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트 빌딩 벽에 ‘보기(보가트의 애칭)와 바콜’(Bogie and Bacall)이라고 새겨 놓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여배우의 멈추지 않는 연기 혼이었다. 50대에 접어든 1970년대에도 그녀의 모습은 꾸준히 관객의 시야 안에 있었고 <미저리>(1990) <패션쇼>(1993) 같은 영화의 크레디트에서 ‘로렌 바콜’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70대에 접어들었을 때 제2의 전성기가 찾아왔다는 사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연출한 <로즈 앤 그레고리>(1996)로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오스카 후보에 올랐다. 올해 87세인 로렌 바콜. 아직도 현역인 그녀는 아찔한 아우라의 여신들이 존재했던 그 시절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레전드일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