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과속스캔들>에 이어 <써니>(작은 사진)로 흥행 대박을 터트린 강형철 감독. 그는 최근 충무로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이다. |
<과속 스캔들>에 이어 <써니>로 또 다시 흥행 대박을 터뜨린 강형철 감독 외에도 수많은 감독들이 영화제 기간 내내 캐스팅을 원하는 일선 매니저와 제작사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대형 배급사인 CJ E&M 영화부문,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등의 관계자들로부터도 VIP 대접을 받았다. 영화제 첫 주말에 연이어 열린 대형 배급사들의 파티에는 유명 감독들이 대거 초청받았고, 그들을 챙기라는 관계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최근 톱스타를 앞세운 영화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신 반면 <써니> <시라노:연애조작단>과 같이 스타 파워보다 감독의 연출력에 기댄 작품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감독의 중요성은 크게 부각되고 있다. 한 배급사 관계자는 “완성본을 본 뒤 ‘그 좋은 시나리오를 갖고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시나리오가 좋지 않은데 투자하고 제작하는 경우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같은 시나리오도 감독이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천양지차다”라고 말했다.
이를 깨닫고 가장 먼저 공격적으로 감독 영입에 나선 주인공은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이다. CJ E&M은 최근 <시라노:연애조작단>으로 300만 관객을 모은 김현석 감독과 직접 계약을 맺었다.
김현석 감독과 CJ E&M의 만남이 더 인상적인 것은 제작사가 아닌 감독 개인과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CJ E&M이 윤제균 감독이 이끄는 JK필름, 박찬욱 감독의 모호필름 등과 손을 잡은 적은 있지만 감독과 직접 계약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써니>를 투자배급했던 CJ E&M은 강형철 감독도 영입하기 위해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형철 감독이 아직 세 번째 작품의 윤곽조차 잡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하면 그의 연출력 하나를 믿고 미래 가치에 투자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과거 대형 연예기획사들이 거액을 주고 톱 배우들과 앞 다퉈 계약했던 모양과 흡사했다.
CJ E&M의 한 관계자는 “요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보면 ‘2011년 ◯◯◯감독 작품’이라는 자막을 볼 수 있다. 능력 있는 감독들에게 미리 계약금을 주고 감독 자체의 브랜드를 사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좋은 감독을 확보하면 톱 배우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 흥행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에는 좋은 배우들이 서로 출연하려 줄을 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감독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감독 영입전을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쇼박스다. 쇼박스는 3년 전 <타짜> <범죄의 재구성> 등을 만든 최동훈 감독과 <미녀는 괴로워> <국가대표>를 만든 김용화 감독과 계약을 맺었다. 현재 김윤석 김혜수 전지현 등이 출연하는 영화 <도둑들>과 3D 영화 <미스터 고>를 각각 제작 중인 두 감독은 쇼박스와 계약으로 약 10억~15억 원가량의 계약금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이 대접받는 시대의 도래가 반드시 한국 영화의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감독들이 대형 투자사와 직거래를 시작하면서 또 다른 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그동안 신인 감독들을 키우고 활용해 온 중소 영화 제작사들의 설자리는 상대적으로 좁아진 것. 예를 들어 김용화 감독은 KM컬쳐에서 <오 브라더스>로 연출 데뷔한 후 <미녀는 괴로워>를 통해 스타 감독 대열에 합류했고 최동훈 감독 역시 싸이더스 FNH의 전 수장이었던 차승재 대표의 지원 속에 <범죄의 재구성> <타짜> 등을 성공시키며 스타 감독이 됐다.
이에 대해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이런 식이라면 유명 감독들이 직접 제작사를 차린 후 대기업의 지원을 받으며 영화를 만드는 시스템이 확대될 것이다. 그런 경우 자본 논리에 따라 영화가 제작되며 작품성보다는 흥행 위주의 영화가 제작될 확률이 높아진다. 자신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곳과 손을 잡는 감독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산업’으로 전락할 수 있다”라고 꼬집었다.
<영화는 영화다> <고지전> 등을 연출한 장훈 감독과 김기덕 감독의 대립은 충무로에서 자란 감독들이 대형 투자배급사 체제로 스며들며 발생할 수 있는 마찰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쇼박스는 저예산 영화 <영화는 영화다>로 가능성을 보여준 장훈 감독의 연출력을 높이 사 송강호-강동원이 출연하는 메이저 영화 <의형제>의 연출을 맡겼다. 장 감독은 542만 명이라는 흥행 스코어로 믿음에 보답했고 쇼박스는 100억 원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고지전>까지 장훈 감독에게 건넸다.
김기덕 사단 아래서 영화를 배우던 장훈 감독은 당초 올해 중순 개봉된 김기덕필름의 영화 <풍산개>를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결국 쇼박스와 손잡은 장훈 감독을 보며 배신감을 느낀 김기덕 감독은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고 영화 <아리랑>에서도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또 다른 영화 관계자는 “장훈-김기덕 감독의 마찰은 극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직접 발굴하고 공들인 감독이 성장한 후 대기업 자본과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며 쓴 소주잔을 기울인 제작자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반면 감독들의 위상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못한 제작사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과거 한 영화 제작자가 자신이 발굴한 감독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가 옆에서 이를 말리는 또 다른 감독과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었다. 이 관계자는 “몇몇 제작사들은 ‘내 새끼’에게 그 정도도 못하느냐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충무로가 예전처럼 정(情)을 우선시하며 돌아가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관계도 좋지만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과 대우가 있어야 대기업 자본이 몰려 든 충무로가 발전적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고 충고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