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리가 1992년 당시 파격적인 동성애를 연기한 <성애의 침묵>. 작은 사진은 데뷔작 <파리애마>. |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충무로 여배우 기상도엔 일대 지각 변동이 일어난다. 모델 출신의 여배우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 <이장호의 외인구단 2>(1988)의 이응경, <서울 무지개>(1989)의 강리나, 198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다가 뒤늦게 주목받았던 유혜영, <돌아이 4>(1988)의 우미나 등 170㎝에 육박하는 장신의 여배우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글래머 일변도였던 1980년대 중반과 비교하면 큰 변화였다.
유혜리(1964년생. 본명 최수연)가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모델라인 2기로 유혜영의 직속 후배였던 그녀는 169센티미터의 큰 키에 서구적인 마스크로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단국대 의상학과 출신으로 대학 시절부터 모델로 활동하던 그녀는 공무원인 아버지의 엄한 단속으로 연예계 활동이 쉽진 않았다. 이때 만난 사람이 바로 정인엽 감독. 두손필름을 설립하고 자신만의 ‘애마 시리즈’를 이어가려 했던 그는 1~3편을 연출했던 연방영화사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어 더 이상 ‘애마’에 ‘부인’을 붙인 제목의 영화를 내놓을 수 없었다.
이때 정인엽 감독은 국제무대로 확장한 새로운 애마 시리즈를 기획한다. 이른바 <파리 애마>(1988)는 그렇게 탄생했고, 새로운 애마 캐릭터를 위해 미국까지 가서 오디션을 했던 그는 유혜리를 만난 후 캐스팅을 확정했다. “평범한 모델인 줄 알았는데 뭔가 힘이 느껴졌다”는 게 유혜리에 대한 정 감독의 첫 느낌. “기존의 1~3대 애마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정 감독은 그녀와 함께 파리 로케이션을 떠났다.
올림픽으로 국제화 분위기에 들뜨던 시절 <파리 애마>는 그해 한국영화 흥행 4위라는 놀라운 성공을 거둔다. 파리의 이국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성적 욕망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 기존 <애마 부인> 시리즈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지만 유혜리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는 이 영화의 흥행을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사실 그녀는 기존의 글래머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지만 ‘파리’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세련된 느낌에 귀여우면서도 섹시하고, 또 지적인 느낌이 결합된 복합적인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다. 참고로 정인엽 감독은 2년 뒤 <집시 애마>(1990)에서 또 한 번 모델 출신인 이화란을 캐스팅해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첫 캐릭터가 ‘애마’라는 건, 1980년대의 상황에서 여배우에게 큰 짐이었다. 이 영화의 성공 이후 에로 영화 제의만 30편 가까이 들어왔고, 마광수 감독의 <권태>(결국은 영화화되지 못했지만) 여주인공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은 데뷔작의 에로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단명하는 것이 당시 수많은 여배우들의 숙명 아닌 숙명. 하지만 유혜리는 희귀하면서도 조금은 놀라운 케이스였다.
그녀의 두 번째 영화 <오늘 여자>(1989)는 여성 멜로드라마의 장인인 박철수 감독의 작품으로 그녀는 중산층 여성의 공허한 삶을 꽤 훌륭히 소화해냈다. 그리고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1991)은 유혜리라는 배우가 지금까지도 장수할 수 있는 토대가 된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크게 넓힐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술집 작부 출신으로 남편 배일도(박중훈 분)를 휘어잡고 사는 강한 생활력을 지닌 잡초 같은 여성을 연기하며 그해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92년 그녀는 정인엽 감독과 다시 만나 마지막으로 에로티시즘에 몸을 맡긴다. 실비아 크리스텔과의 공연으로 화제가 된 <성애의 침묵>은 <파리 애마>의 좀 더 ‘쎈’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인엽 감독이 동서양의 성 모럴이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는 이 영화에서 유혜리는 SM과 동성애 등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던 콘셉트의 섹슈얼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몇 편의 영화가 더 있었지만 연극 무대와 TV 드라마로 무대를 옮긴 유혜리는 연극계에서 만난 이근희와 1994년에 결혼했고(1998년 이혼) 이후 꾸준히 연기 활동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에로 이미지로 시작한 여배우 중 아마도 가장 빨리 그 이미지를 벗고 생활 연기자로 변신한 케이스일 유혜리. 최근 아침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에도 나와 자신의 일상을 알리고 있다. 동생인 최수린도 연기자로 활동 중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