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풍에 묻혀 있는 아름다운 윤필암. |
어리석음은 어쩔 수 없다. 사불산으로 들면 그곳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더 없이 부러워진다. 무슨 복이라서 매일 단풍과 놀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세속의 생활을 버리고 이곳에서 그저 앉아만 있으라고 해도 사흘을 못 버틸 것을 말이다.
사불산은 문경시 산북면 전조리에 자리하고 있는 해발 913m 높이의 산이다. 공덕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 산은 제법 멋진 산세에도 불구하고 등산객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다. 대승사를 기점으로 잡는 코스가 짧고 단조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산이 아니라 산책에 목적을 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승사와 그에 달린 윤필암, 묘적암 등을 두루 둘러보는 길이 걷기에 더할 나위 없다. 왕복 4㎞ 정도로 거리도 적당하다. 무엇보다 계절이 좋다. 단풍과 낙엽이 어우러져 무척 아름답다.
대승사는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다. 사불산 허리에 자리한 이 절은 신라 진평왕 9년(587) 창건한 절이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대승사는 1604년부터 1701년까지 중창의 과정을 거쳤다. 1862년(철종 13) 건물 대부분이 다시 소실된 후 수차례 중수공사가 있었다. 운명이 기구한 것인지 1956년 다시 화마가 덮치기도 했다.
대승사 가는 길은 전나무와 참나무류들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다. 오른쪽으로는 계곡이 흐른다. 오랜 가을 가뭄 탓인지 물소리가 바람소리에 묻힌다. 전두마을에서부터 약 4㎞가량 이 길을 달리면 일주문이 나오고 그 뒤로 대승사가 자리하고 있다. 절 앞 마당 한편에는 무료다실이 있다. 누구나 차를 마시며 쉬어갈 수 있도록 지은 건물이다. 다실 너머로는 허물어질 듯 서 있는 삼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끼고 있다.
절로 들면 대웅전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우측으로는 응진당과 극락전, 명부전, 대승선원 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그 관계 문서 등과 함께 보물 575호로 지정된 목각후불탱이 봉안돼 있다. 본래 영주 부석사에 있던 것을 1869년 대승사로 옮겨 왔다. 구도와 조각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이런 목각탱은 예천 용문사와 상주 남장사 등에만 남아 있다. 대승사에는 또한 선원에 보물 하나가 더 있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그것이다. 보물 991호로 지정된 작품으로 15세기 후반 조성된 것이다. 선원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지 않아 이 부처를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비록 다시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대승사의 건물들은 그 동안 세월에 잘 녹아든 느낌이다. 한껏 치장하려 단청을 하기보다 비바람에 씻겨 내려간 그대로 두었다. 희미한 색깔과 문양이지만, 대웅전의 꽃살창이나 극락전의 연꽃 그리고 명부전 외벽의 탱화는 그래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 대승사 마애불의 모습. |
그 당부가 아니더라도 이 길은 차로 달려선 안 될 곳이다. 묘적암까지 겨우 1.5㎞ 남짓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다소 오르막이긴 하지만 힘든 길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이곳의 단풍과 낙엽이 절정이다. 자동차로 휙 하니 달려서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쉬운 길이다. 설렁설렁 해찰하며 걷는 것이 이 길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오색의 단풍은 햇빛에 부서지며 마음을 달뜨게 하고, 바닥에 떨어져 쌓인 낙엽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서지며 그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 길을 걷다보면 윤필암이 먼저 나온다. 비구니 암자답게 정갈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불전이 왼쪽 바위 중턱에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윤필암의 풍경이 그만이다. 사불전은 부처를 따로 모시지 않고 통유리창을 내어 놓은 게 특징이다. 사불산 정상에 조성한 사방불을 바라보도록 했다.
묘적암은 윤필암에서 약 500m 가량 더 올라가면 나온다. 길은 구불구불 뱀처럼 숲을 관통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흩날린다. 볕이 좋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바람에서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묘적암 바로 아래에는 마애불이 하나 있다. 경북유형문화재 239호로 지정된 부처다. 높이 6m, 너비 3.7m의 바위면에 조각된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랜 시간을 건너왔음에도 마애불은 마모된 부분이 거의 없이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본래 이곳에는 미륵암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마애불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약수터가 있고 오른쪽으로 대승사 부도, 왼쪽으로 묘적암이 자리하고 있다. 묘적암은 고려말 고승 나옹화상이 출가한 곳이기도 한 암자다. 암자 앞에는 수행 중이니 조용히 다녀가시라는 팻말이 있다. 그 때문일까. 살며시 떼는 발걸음에도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신경 쓰인다.
대문격인 불이문을 지나면 조붓한 암자의 마당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건물이 일자배치되어 있다. 섬돌에는 이곳에 거하는 승려의 것으로 보이는 하얀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가만히 암자 마당에 서서 사불산에 작별을 고하는 단풍을 내려다보다가 건물 안에서 들리는 ‘어흠’ 하는 헛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암자를 빠져 나온다.
김동옥 여행전문프리랜서 tour@ilyo.co.kr
▲길잡이: 중부고속국도 문경새재IC→상주/문경 방면 우측 방향(3번국도)→호계면에서 김용사/대승사 방면 좌측길→대승사.
▲먹거리: 대승사 주변에는 음식점이 없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운달산 김룡사가 있는데, 그 바로 아래에 김천식당(054-552-6943)이라고 닭백숙과 산더덕구이를 잘 하는 집이 있다. 당연히 집에서 키우는 토종닭이다. 직접 담은 동동주가 별미다.
▲잠자리: 대승사에서 15분 거리인 문경시 흥덕동 일대에 설악파크(054-554-7712), 로즈파크장(054-552-9271) 등 숙박업소가 꽤 있다. 다소 거리가있지만 새재 쪽에 숙소를 잡는 것도 괜찮다. 문경유스호스텔(054-571-5533), 문경관광호텔(054-571-8001) 등 묵을 만한 곳들이 있다. 근처 문경온천지구에도 숙박업소들이 많다.
▲문의: 대승사 054-552-7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