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슨과 생전의 브라운. |
194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다리를 절었지만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운동했고,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스타로 떠올랐으며 전액 장학금으로 USC에 진학했다. 프로 선수가 된 건 1969년. 그는 프로 풋볼 선수가 되기 전 스무 살 때 당시 18세였던 마거리트 휘틀리와 결혼했고 1968년에 딸 아넬, 1970년에 아들 제이슨을 낳았다.
휘틀리는 남편이 캘리포니아의 집에 좀 더 많이 머물기를 바랐지만, 심슨은 버팔로 빌스와 재계약을 하면서 연고지인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최고의 스타였던 그의 곁엔 항상 여성들이 따라 붙었고, 심슨은 결코 이를 마다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1974년에 첫 영화 <버닝 크로스 The Klansman>를 찍고 TV 쇼 프로그램 출연이 늘어나면서 그는 스포츠를 넘어 엔터테인먼트 전 분야를 아우르는 유명 인사가 된다. 철저한 자기 관리 덕에 대중적 선호도는 점점 상승했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소리 없이 붕괴하고 있었다. 1977년에 낳은 세 번째 아이 아렌은 두 살도 채 안 되었을 때 수영장에 빠져 1주일 만에 호흡기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휘틀리와 심슨은 1978년 9월에 이혼했다.
이혼 직후부터 ‘파티 애니멀’이 되어 숱한 여자들과 어울리던 심슨은 베벌리힐스의 어느 클럽 웨이트리스인 니콜 브라운과 만난다. 독일 출신이었던 그녀는 당시 18세. 심슨과 열세 살 차이였지만 첫눈에 서로에게 빠졌고 곧 동거를 시작해 1985년 2월에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다. 그 해 첫 아이 시드니가, 1988년엔 둘째 아이 저스틴이 태어났다. 영화 <총알 탄 사나이>(1988)에 출연하면서 심슨의 대중적 인기도 더욱 높아지면서 백인과 흑인의 인종 간 결혼이라는 쑥덕거림도 곧 사라졌다.
하지만 결혼 1년 만에 문제가 터졌다. 1989년 새해 첫 날 911엔 니콜 브라운의 신고가 접수된 것. 결국 브라운을 폭행한 심슨에게 법원은 심슨에게 벌금형과 사회봉사 활동을 명령했다. 결국 이들 부부는 1992년 이혼했다. 심슨은 재결합을 시도했지만 브라운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1993년엔 그녀의 집 밖에서 난동을 부리다 체포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4년 6월 12일 심슨과 브라운은 딸 시드니의 학예회에 각자 참석했다.
지인들과 식사를 나눈 후 집으로 돌아온 브라운은 레스토랑에 선글라스를 두고 온 것을 알게 됐다. 웨이터인 로널드 골드먼은 브라운과 헬스클럽에서 만나 친구가 된 사이로 연인이라고 하긴 아직 이른, 가끔 그녀의 집으로 놀러 오는 사이였다. 골드먼은 선글라스를 돌려주려 브라운의 집을 찾았다. 그날 밤 브라운과 골드먼은 처참하게 난도질된 사체로 발견됐다. 심슨은 호텔 방에서 공항에 갈 리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알리바이를 댔다. 6월 16일 브라운의 장례식에 참석한 심슨은 그 다음 날 1급살인 죄목의 체포 영장을 받았다. 변호사를 내세운 뒤 몰래 흰색 포드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해 도망가던 심슨의 모습은 헬기로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결국 심슨은 스스로 돌아왔다.
결정적 증거는 혈흔이었다. 심슨의 차에서 발견된 혈흔은 브라운과 골드먼의 것과 DNA 검사 결과 일치한 것. 사고 현장 근처에서 장갑도 발견됐다. 하지만 심슨은 무죄를 주장했고, 곧 네 명의 1급 변호사들로 드림 팀을 구성했다. 1994년은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이 있은 지 2년밖에 안 된 시점이라 심슨의 변호사들은 그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건을 인종 문제로 몰고 가기로 결정한 것.
134일 동안 TV로 중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심슨의 재판은 인종문제와 치정 살인과 로맨스가 뒤엉킨, 일일 연속극과 같았다. 이 드라마에서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던 사람은 당시 사건 현장을 담당했던 경찰 마크 펄먼이었다. 그가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세는 역전됐고, 증거물인 장갑이 너무 작아 심슨의 손에 안 맞자 재판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9명의 흑인과 2명의 백인과 1명의 히스패닉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무죄’를 선고했고, 심슨은 “나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죽이지 않았고 그럴 리 없으며 그럴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거라는 사실을, 배심원들이 반드시 밝혀줄 거라는 확신 말이다”라며 긴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여론은 들끓었다. 전형적인 ‘무전유죄 유전무죄’ 사건이었던 심슨의 재판은 미국 사회엔 아직도 ‘인종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가 잠재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후의 일이다. 니콜 브라운의 부모가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 법원은 유죄를 선고하며 3350만 달러라는 엄청난 배상금 지급을 명령한 것. 형사에선 무죄였지만 민사에선 유죄이니, 어찌 보면 ‘사실상 유죄’인 셈이다. 드림 팀에게 고액의 변호비용을 지불하고 배상금까지 지급한 후 심슨은 빈털터리가 됐다. 이후 세금 체납 등 잘잘한 송사에 시달리던 그는 2007년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 침입해 기념품 중계개상 두 명을 총기로 위협하고 강탈하려 하다가 체포되었다. 총기가 사용되어 살인의 위험이 있었던 사건이었던 만큼 중형을 선고받은 심슨. 60세에 33년 형을 언도받았으니, 아무래도 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듯하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