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 흥행 빨간불, 이재명 1인정당 우려 목소리…잠룡 가뭄 속 이낙연 복귀 시점 관심 쏠려
8·28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재명 의원 독주를 견제하는 쪽은 97그룹(90년대 학번 70년대 생)이었다. 그동안 민주당을 이끌어왔던 86그룹(80년대 학번 60년대 생) 용퇴론과 맞물려 97그룹이 세대교체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불거졌다. 그러나 97그룹 대안론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출사표를 던진 뒤 컷오프를 통과한 97그룹 정치인은 두 명이었다. 박용진 강훈식 의원이다. ‘어대명’이라 불리는 이재명 독주 체제를 견제하면서 당 세대교체를 견인하겠다는 일성을 내세웠다. 박 의원과 강 의원 사이 단일화 가능성은 이번 전당대회 흥행을 견인할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8월 16일 기준 중간집계 3위를 기록하고 있던 강훈식 의원은 당대표 후보직 사퇴를 선언했다. 강 의원은 “우리는 더 큰 민주당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남은 두 분 중 누가 당대표가 되더라도 가슴 뛰는 민주당을 만들 수 있게 가장 낮은 곳에서 헌신적으로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강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 계파적으론 친명계, 세대로는 97그룹으로 분류돼 왔다. 강 의원의 완주 가능성과 반 이재명 전선 97그룹 단일화가 동시에 거론된 배경이다. 8월 초 당권 레이스 구도가 결정될 즈음 민주당 한 관계자는 “강 의원이 이번 당권 레이스 키플레이어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강 의원이 완주를 한다면 이재명 의원이, 단일화에 응한다면 박용진 의원이 반사 이익을 볼 수 있는 구도”라고 했다.
두 가지 시나리오는 모두 실현되지 않았다. 강 의원은 단일화로 인한 사퇴가 아닌 사퇴 카드를 꺼냈다. 당권 레이스 완주보다 한층 더 이재명 의원 쪽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강 의원 사퇴로 8·28 전당대회는 이재명 의원과 박용진 의원의 양자구도가 됐다. 전당대회 흥행엔 빨간 불이 켜졌다.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회는 강 의원 후보직 사퇴로 인해 그 동안 지역별 권리당원 투표와 1차 국민 여론조사에서 강 의원이 얻은 표를 모두 무효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두 당권 주자의 득표율이 조정을 거쳤고, 이재명 의원은 합산 80% 안팎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두를 달리게 됐다.
대선 패배 이후 불거진 86그룹 용퇴론과 97그룹 대안론은 모두 힘을 잃고 ‘이재명으로 대동단결’이 이뤄지고 있는 형국이다. 친문을 향한 주 비판소재였던 ‘패권주의’ 화살은 이제 친명계를 향하고 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어대명 일변도’ 독주체제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당장 전당대회 흥행은 물론이거니와 차기 잠룡들의 성장세까지 가로막힐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에서 당직을 맡았던 한 관계자는 “대선 이후부터 민주당을 바라보는 프레임 자체가 ‘친명 대 반명’으로 설정됐다”면서 “대선 정국과 정권 교체기를 거치면서 이재명 의원이 그만큼 빠르게 당을 장악해가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당내에선 이미 차기 대선에서 이재명 의원이 재수에 도전하는 게 당연시되는 수순을 밟고 있다”면서 “이재명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거론될 뿐 당내 다양성이 사라져가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 초반만 해도 춘추전국시대처럼 수많은 잠룡들 이름이 오르내리며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힌 반면, 지금은 이재명이라는 이름 하나가 민주당을 좌우하고 있는 상황을 마주한 것을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라고 덧붙였다.
4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민주당 잠룡군은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율이 고공행진하고, 잠룡 인재풀이 넘쳐흐르던 상황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년 집권론’을 띄운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18년 11월 25일 이 전 대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왔다”면서 “(문재인 정부 정책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 20년이 아니라 더 오랜 기간 집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정치권에선 정말 20년 집권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탄핵 국면이 정국을 휩쓸고 간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던 까닭이다. 당시 보수 진영은 ‘등용문 아래 연못이 말랐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궤멸에 가까운 위기에 처했다. 민주당은 상황이 달랐다. 잠룡군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문재인 정부 이후 차기 대권을 둘러싼 경쟁에 돌입한 모양새였다.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유력 대권주자로 분류됐던 이들은 지자체장 출신들이었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해 경기도지사였던 이재명 의원, ‘원조 친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경부고속도로 라인을 따라 배치돼 있었다. 풍부했던 지자체장 잠룡군은 문재인 정부 5년을 관통하면서 그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3선 서울시장으로 대권을 노리던 박원순 전 시장은 2020년 7월 9일 성추행 파문이 불거질 기미가 보이는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친노 적장자로 평가받으면서 대연정을 주장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20년 집권론이 대두되기 전인 2018년 3월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며 지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심에서 법정구속된 안 전 지사는 8월 4일 출소했다.
‘드루킹 사건’ 중심에 있던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는 2021년 7월 21일 댓글 조작(컴퓨터 등 장애 업무방해) 혐의로 징역 2년을 확정 판결을 받으면서 지사직을 상실했다. 동시에 2028년까지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김 전 지사는 최근 윤석열 정부 첫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 전 지사를 동시에 사면하는 ‘스왑딜’ 방식이 정치권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권 유력 인사에 대한 특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지자체장 출신 말고도 민주당 잠룡군은 많았다. 전직 총리들 역시 유력한 대권 주자로 평가받았다. 역대 최장수 국무총리 타이틀을 달았던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정세균 전 국무총리, 김부겸 전 국무총리 등이다. 이낙연 전 대표는 문재인 정부 중후반 대세론을 일으킬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이 전 대표는 2021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의원직을 던지면서까지 총력전을 벌였지만, 이재명 의원에게 패했다.
지금도 민주당 내에선 이낙연 전 대표가 이재명 독주체제를 견제할 유일한 카드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이 전 대표는 대선과 지방선거 이후 미국으로 떠나 조지워싱턴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방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 전 대표 정계 복귀 여부는 불분명하다. 한 야권 인사는 “이낙연 전 대표는 이재명 독주체제가 굳어지고 그에 따른 어떤 문제점이 발생한 다음을 컴백 시점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세균 전 총리와 김부겸 전 총리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둘은 민주당 혁신 비대위원장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정 전 총리는 헌정사상 첫 국회의장 출신 총리다. 지금은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민주당 험지인 TK(대구·경북)에서 잔뼈가 굵은 김부겸 전 총리는 문재인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로 꾸준히 대권주자급 인사로 거론된 바 있다. 김 전 총리는 5월 12일 총리 퇴임식에서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 역시 민주당 잠룡군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중후반을 뒤흔든 ‘조국 사태’ 이후 법무부 장관 출신 잠룡들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줄었다는 분석이다. 조 전 장관은 사실상 정계 복귀가 어려운 상황이며, 추 전 장관은 지난 대선 경선에서 탈락한 뒤 대외 활동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민주당 안팎에선 ‘이재명 1인정당’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친문 계열로 분류되는 한 야권 관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가 맞붙었던 2002년 당시 치열한 잠룡군 경쟁을 뚫고 올라온 노 전 대통령이 신승을 거두지 않았느냐”면서 “1인 정당을 구축했던 이회창 후보는 패했다. 이 사례가 전하는 교훈은 1인 정당은 결정적인 시기에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동교동계와 범동교동계를 비롯해 노 전 대통령 등 소장파가 민주 진영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경선 흥행을 불러 일으켰고,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통해 방점을 찍었다”면서 “아무리 큰 대세론이라도 치열한 경쟁을 통한 흥행을 꺾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국민의힘은 되레 선수층이 두꺼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당이 이재명 1인 정당으로 개편되는 현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이재명 대항마를 육성하기 위해 친문계를 중심으로 인재 영입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평론가 신율 명지대 교수는 “이른바 ‘어대명’ 현상은 민주당 내에서 비주류가 주류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면서 “동시에 민주당 내 선수층이 얇아진 것 또한 사실”이라고 했다.
신 교수는 “현재 민주당 내에서 이재명 의원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이낙연 전 대표”라면서 “이 전 대표는 문재인 정부 시절 거론되는 민주 진영 잠룡 중 유일하게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도덕적인 타격을 받지 않았다. 당헌·당규가 바뀐다고 할지라도 이재명 의원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당내 구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가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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