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울한 살인 혐의로 인생을 송두리째 날린 로스코 아버클. 47세로 세상을 떴다. |
만약 로스코 아버클이 ‘그 일’만 겪지 않았다면 채플린에 버금가는 희극인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채플린 역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중절모의 아이디어를 아버클에게서 얻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아버클이 80여 년 전에 1년 동안 벌어들인 돈은 100만 달러. 지금으로 치면 2000만 달러 이상 수준이다. 하지만 1921년 노동절 휴가 기간에 겪은 사건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1887년에 태어난 로스코 아버클은 태어날 때 7㎏에 달했던 우량아였다.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돌며 사업을 하곤 했지만 항상 실패했고 가끔씩 집에 돌아온 그는 그 울분을 커다란 몸집의 아들을 때리면서 풀곤 했다. 덩치만 크고 소심했던 아이였지만 아버클에겐 유연한 몸과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었고 8세에 우연히 무대에 섰다. 꾸준히 무대 경력을 쌓아왔던 그가 당시 한참 떠오르던 ‘영화’라는 신매체에 발을 디딘 건 26세였던 1913년. 2년 만에 엄청난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이 사건은 새발의 피였다. 이후 1921년에 아돌프 주커의 파라마운트와 계약했는데 주커는 아버클을 동시에 세 편의 장편영화를 찍게 할 정도로 혹사시켰다. 9월 첫째 주 월요일인 노동절의 휴가 기간 주커는 LA의 극장주 연회에 참석해달라고 했지만 아버클은 이를 거절하고 휴식을 위해 친구들과 보트 여행을 떠났다. 주커는 불처럼 화를 냈다. 아버클의 여행에 동행한 사람은 배우인 로웰 셔먼과 영화감독인 프레드 피쉬바크였다. 1921년 9월 3일 토요일 그들은 서부 해안을 보트로 돌고 샌프란시스코의 성 프랜시스 호텔의 1219호, 1220호, 1221호 객실에 투숙했고 1220호에서 파티를 열었다.
파티엔 몇 명의 손님이 초청되었는데 프레드 피쉬바크의 손님 중엔 연예 매니저인 엘 셈네이처가 있었다. 이혼 소송 관련 자료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온 셈네이처 곁엔 어시스턴트인 뱀비라 모드 델몬트라는 여성이 있었고 당시 25세였던 여배우 버지니아 러페이도 있었다. 샘네이처의 클라이언트였던 러페이의 무분별한 생활은 당시 할리우드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술에 취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는데 샌프란시스코엔 낙태 수술을 위해서 왔던 것. 아버클은 그녀를 파티에서 제외시키려 했지만 친구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 버지니아 러페이 |
그런데 9월 8일 버지니아 러페이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 경찰이 오기 전에 이뤄진 불법 검시 결과 그녀의 방광이 파열되어 있는 것이 발견됐다. 며칠 동안 화장실에 가지 않으며 모르핀 주사만 맞았던 러페이는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때 델몬트는 죽기 전까지 러페이 곁에 있었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 경찰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아버클이 러페이를 성폭행했다고 했다. 그녀는 언론에도 정신없이 날조된 사실을 떠들었고 160㎏에 달하는 아버클이 가녀린 여배우를 폭행했고 그 결과 여성은 방광이 터질 정도로 고통받아 죽었다는 식의 끔찍한 이야기가 타블로이드 신문을 장식했다. 거대한 난봉꾼이 어린 여배우를 가혹하게 죽인 것이다.
문제는 담당 검사였던 매튜 브래디였다. 그는 델몬트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클을 유죄로 몰아갔다. 이 사건을 통해 법조계에서 자신의 위치가 상승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후 많은 도시에서 아버클이 출연한 영화의 상영이 금지되었고 할리우드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이자 전 우체국장인 윌 헤이스를 추대해 자체적인 검열 기관, 즉 ‘헤이스 오피스’를 설립했다. 부도덕한 아버클에 대항해 영화 산업의 도덕성을 강조하기 위한 자충수였다.
3차에 걸친 공판 끝에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아버클의 무죄를 확정했다. 아버클에게 영화 출연 금지를 명령했던 헤이스 오피스는 그해 크리스마스에 그 조치를 풀었지만 대중들은 격렬하게 분노했다. 최고의 스타였던 아버클은 결국 ‘윌리엄 굿리치’라는 가명으로 몇 편의 영화를 연출하는 상황에 처했고 결국엔 스튜디오의 개그 대본 작가로 전락했다. 1931년엔 어느 잡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영화배우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명감독 중 하나였던 할 로치는 그에게 카메라 앞에 설 기회를 주었지만, 여성 단체들의 거센 항의로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결국 그는 보드빌 쇼 무대로 돌아갔고 사건이 있은 지 11년 만인 1932년에 단편 코미디에 출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34년에 드디어 장편 코미디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지만 촬영 직전 시기에 맨해튼의 한 호텔 방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했던, 짧지만 사연 많은 인생이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