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의 에든버러에서는 많은 예술가들이 무수한 ‘이야기’를 던지면, 시민들은 귀기울여 듣고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널리 퍼뜨린다. 이런 과정에서 자존심 강한 스코틀랜드 사람의 고유의 문화가 도시의 정신으로 재탄생된다.
2차대전 직후 전흔을 씻고 치유하기 위해 형성된 축제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로 거듭났다. 시내 모든 공연장·전시장 심지어 클럽까지도 축제에 참여한다. 변방 혹은 비주류를 뜻하는 프린지(Fringe)는 말 그대로 무명의 공연 단체들이 거리 위의 모두에게 이야기를 거는 공연이다. 지금도 프린지 페스티벌은 여전히 거리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에든버러의 성은 적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높은 바위 절벽에 우람하게 솟아 있지만, 그 안에서는 타투 페스티벌(Military Tattoo Festival)이란 이름으로 세계 각국의 군악과 춤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8월 밤의 에든버러성 8000여 명의 관객은 환호로 응답한다.
‘이야기’가 문화예술로 전달되고 시민들은 자신만의 ‘경험’으로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이런 과정이 거듭되면서 저항하며 자유를 외쳤던 에든버러는 비주류(프린지:Fringe)마저 포용하는 도시로 성장했고, 왕궁에서 출발해 힘찬 걸음을 내딛었을 왕과 군인의 거리 로열마일(Royal Mile)은 밤 늦게까지 타투 페스티벌의 여흥으로 가득한 시민들의 거리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흔한 축제의 감상평이다.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 내용을 말하려고 한다. ‘이야기’와 ‘도시’에 관해서다.
#‘이야기’와 ‘경험’ 그리고 ‘도시’
영화나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야기’다. 주인공의 삶과 갈등 그리고 주변부와 빚어지는 모든 상황은 ‘이야기’를 만든다. 시청자는 감동의 박수를 보낼 수도, 시청자 게시판에 주인공을 살려내라며 항의성 글을 올릴 수도 있다. 이 모두 ‘이야기’에 공감했다는 증거다.
‘이야기’의 중요성은 정치 분야에서도 두드러지는 효과를 낸다. 얼마 전 타계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세계가 깊은 애도와 함께 감응하는 이유는 여왕이 지닌 이야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추구했던 일대기는 대중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다. 때론 아주 짧은 사진이나 광고 한 컷으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공격적 마케팅도 사실 서사구조를 갖는데, 자신만의 서사가 군중에서 회자된다면 어찌됐든 반쯤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중요성이 어디 이뿐이랴. 어느 주민이 동네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시대의 정승이 귀양살이 했던 사실,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던 사건, 80년대 개발로 인한 장소와 얽혀진 일화 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주민들은 정서적 동일체로 형성된다.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정치‧사회‧외교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이끌어내며 이윽고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으로 이끌어 나간다.
도시라는 것은 단순히 시골의 반대말이 아니라 삶의 공간적 단위다. 여기에서는 ‘이야기’를 ‘경험’하고 나누는 다양한 공동체 형성 과정이 빈번하다. 동호회, 공유주방, 학교, 집회현장, 친목모임 등 관계 형성의 장은 헤아릴 수 없다. 각자의 정체성과 특수성은 이야기를 통해 공감되고 퍼져간다. ‘이야기’를 ‘경험’하는 이 과정을 ‘문화’라 하고, ‘문화’를 통해서 정서적 공감대를 폭넓게 형성할 수 있다면 ‘문화도시’라고 할 수 있다.
#도시는 공감의 장…그러나 길게 봐야 할 과정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지역문화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문화도시’라는 개념이 정책목표로 올라왔다. 최소 2년간의 심사과정을 통과하면 문화도시로 5년간 법적으로 지정되며 예산도 지원된다. 다만 기존 도시 마케팅이나 산업적 접근은 젠트리피케이션과 같은 도시 문제에 취약하단 약점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주민의 참여를 통해 도시 고유의 문화적 자원을 활용하는 측면이 강조됐다. 이른바 ‘이야기’를 ‘경험’하는 과정으로서 체계를 갖춘 도시를 문화도시로 상정했다.
그러나 기존 도시 마케팅의 방식이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문화도시의 내용을 간혹 오해하는 측면이 있다. 참여와 공감이라는 측면이 비효율적·비효과적이라 비판한다. 예술프로그램 종류의 확대가 정답이라고 단언하는 일이 아직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참여자수와 프로그램 개수로 효과성을 말하던 방식에서 ‘이야기’가 ‘경험’되는 방식이 더해졌으니 오히려 질적인 부분이 커졌다고 하는 게 맞다고 보인다.
실제로 부산의 문화도시 영도는 주민의 참여와 발견의 방식으로 찾아낸(!) 서체(영도체)로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 하나인 IDEA(International Design Excellence Award)에서 브랜드상을 수상했다. 강원의 문화도시 춘천은 누구나 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 바로 ‘이야기’와‘경험’으로 도시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결과다. 나아가 현재까지 선정된 18개의 법정문화도시가 헤쳐 나가야 할 방향이고, 또 앞으로 형성될 또 다른 문화도시들에 적용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신혜란 서울대 교수는 저서 ‘누가 도시를 통치하는가(이매진)’에서 많은 도시들이 갑자기 비슷한 모습으로 문화와 관광을 쫓기 시작한 이유를 산업 구조와 변화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문화예술이 도시 발전’에 접근하는 방식을 상식적이라 하면서도 각 도시의 고유성을 찾는 방식에 많은 주체들의 융통성과 타협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는 주력산업이 점차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도시 중심에 문화를 놓고 구조를 전환하는 전략을 채택했고, 그 하나의 결과가 오늘의 에든버러다. 저 멀리 에든버러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도시에도 적용된다. 도시란 ‘이야기’와 ‘경험’을 나누는 방식을 다채롭게 가져온 결과이면서 도시의 고유성을 찾기 위한 수많은 노력의 결과다. 공감의 장으로서 도시는 짧은 방편으로 조정하기 어렵다. 자연스럽게 다루면서 길게 봐야 할 과정이다.
진형우. 문화예술 기획자. 예술단체 및 세종문화회관 등을 거쳐 현재 영등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장으로 활동 중이다. 사람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정의돼야 한다고 믿으며 하루를 가치 있게 사는 문화적 방법에 골몰하고 있다.
진형우 영등포문화재단 문화도시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