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4년 개봉된 영화 <선장 알바 레즈>에 출연한 윌리엄 데스먼드 테일러. |
지난주에 소개했던 로스코 아버클 사건은 할리우드를 도덕적으로 무장시켰고 결국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6개월도 지나지 않아 할리우드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당시 미국영화감독협회 회장이었던 윌리엄 데스먼드 테일러가 살해된 것. 아버클처럼 그도 파라마운트 소속이었고 그와 내연의 관계였던 여배우 메리 마일즈 민터도 한솥밥을 먹고 있었다. 아돌프 주커 사장은 일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덮었고, 아직도 진실은 무덤 속에 있다.
1872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윌리엄 커닝햄 딘 태너는 18세에 ‘커닝햄 딘’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고 23세 되던 1901년에 코러스 걸인 에피 해밀턴과 결혼한 후엔 처가의 도움으로 앤틱 숍을 열어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파는 물건들이 ‘짝퉁’이라는 소문이 돌고, 처가 쪽 유산 상속을 받는 데도 실패하면서 그는 술에 빠져 지냈다.
1908년에 그는 뉴욕에서 ‘윌리엄 데스먼드 테일러’라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지만 일자리를 찾아 방랑할 수밖에 없었다. 전직을 살려 샌프란시스코에서 연극을 하던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토머스 인스. 지금의 ‘할리우드’ 자리에 최초로 스튜디오를 세웠던 저명한 제작자 인스는 테일러를 영화에 출연시켰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40대에 접어든 상태. 배우 생활이 머지않았음을 깨달은 테일러는 감독으로 전업했고, 곧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의 주요 감독으로 떠오른다.
감독으로 승승장구하던 테일러는 영화계 상류층들이 모인 해변의 방갈로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 위궤양 수술을 받은 테일러는 영국으로 요양을 떠나면서 비서인 에드워드 샌즈에게 자신이 사인한 수표책을 주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샌즈는 그 수표로 5000달러를 인출했고 서명 위조까지 했으며 테일러의 자동차와 옷과 보석 등을 들고 사라졌다. 얼마 후 사과 편지와 함께 자신이 훔친 다이아몬드 팔찌의 전당표를 보내왔다.
1922년 2월 1일 여배우 메이블은 테일러가 선물로 마련한 책을 받기 위해 방갈로를 방문했고, 다음 날 아침 테일러는 죽은 채 거실에서 발견된다. 그의 운전수인 하워드 펠로우스는 형이자 테일러의 조감독인 해리 펠로우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튜디오의 총괄 매니저인 찰스 에이튼은 펠로우스 형제와 함께 사건 현장에 도착해 스튜디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증거들, 즉 메이블이나 민터와 주고받은 편지 같은 것들을 모두 회수해갔다.
당시 LA 지역에서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파워는 막강했다. 경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검시관이 도착했고, 그때서야 테일러가 가슴에 총을 맞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론은 온갖 가설과 억측을 늘어놓았다. 테일러의 비서였던 헨리 피비가 범인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흑인이자 게이였던 피비를 보수적인 저널에서 몰아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죽은 테일러의 게이설이 나돌기도 했다.
방갈로 지역의 유명 인사들은 대부분 자신의 명성을 위해 목격자로 나서지 않았다. 전날 테일러를 방문했던 노먼드는 테일러와의 로맨틱한 관계를 최대한 축소시키려 노력했다. 검사조차 영화계 간부들과 긴밀한 관계여서 수사 진행은 매우 더뎠다. 파라마운트를 중심으로 한 영화업계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고 업계의 가이드를 따르지 않는 기자들은 경찰의 위협을 받았다. <시카고 트리뷴>에선 “할리우드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100만 달러를 썼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소문만 무성해졌다. ‘메이블 노먼드’ ‘노먼드에게 마약을 대던 딜러들이 고용한 킬러’ ‘메리 마일즈 민터’ ‘과거 테일러의 비서이자 도둑이었던 샌즈’ 등이 거론됐지만 경찰의 공식 발표는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총을 쐈다’였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 사건을 잊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1967년에 베테랑 감독 킹 비더는 그 사건을 영화화하기 위해 25년 전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담당 경찰은 윗선의 지시로 수사를 종결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긴 시간의 조사 끝에 비더 감독은 여배우 민터의 어머니인 샬럿 셀비가 테일러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셀비와 그녀의 딸인 민터와 테일러는 삼각관계였던 것. 하지만 이 내용을 영화로 만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프로젝트를 접었다.
테일러의 죽음은 충분히 그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할리우드와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는 더 이상 영화계가 도덕적으로 타격을 입는 걸 바라지 않았고 자신들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 진실을 영원히 땅 속에 묻어버렸다. 아주 작은 일 하나도 침소봉대되는 요즘에 비한다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80년 전의 ‘권력형 미스터리’인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