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치러지는 대선을 앞두고 재계가 분주하다. 자체적인 판세 분석은 기본이고, 차기 후보로 거론되는 정치인들과 ‘선’을 대려는 모습도 눈에 띈다. 그동안 대기업들의 타깃 1호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안철수 문재인 김두관 등 야권 후보들이 급부상하자 재계의 ‘맞춤형’ 전략은 이들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4대 그룹 중 한 곳인 A 사의 이른바 ‘대권 보고서’를 중심으로 대선을 대비한 재계의 움직임을 따라가 봤다.
“아직 ‘베팅’을 하기엔 이르다.” 대기업 A 사의 한 임원은 최근 기자와 만나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김두관 중 한 명이 대권을 잡을 것 같긴 한데 예상이 힘들다. 총선이 끝나봐야 윤곽이 드러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 대선 땐 유력한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일찌감치 ‘줄’을 댔지만 지금은 판단이 쉽지 않다는 얘기였다.
A 사는 얼마 전 한 여론조사 기관에 ‘차기 대선 후보 적합도’를 묻는 조사를 의뢰해 그 결과를 총수에게 보고했다. 앞서의 임원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매달 실시하고 있다. 정치 현안에 대한 내용은 핵심 보고 사항이 아니지만 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는지라 고위층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총수에게 올라가는 보고인 만큼 신뢰도는 상당히 높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전했다.
5000명 대상 여론조사의 결과를 담은 A 사 대권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김두관 경남지사를 ‘다크호스’로 꼽고 있다는 것이다. 김 지사는 지난 2월 16일 민주통합당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대권 행보를 시작하긴 했지만 문재인 이사장과 안철수 원장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치권에선 차기보단 ‘차차기’를 노릴 것이란 전망도 흘러나왔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 지사는 박근혜 위원장과의 양자대결 시 42%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문 이사장(44%), 안 원장(48%)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동안 김 지사가 대권과 관련해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라고 할 수 있다. 보고서엔 “야권 후보 중 가장 ‘스토리’ 있는 후보로서 한 차례 큰 선거를 치러봤다는 게 장점. 본선 경쟁력도 높음. 다만 안 원장과 문 이사장에 비해 전국적 인지도는 낮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박 위원장의 경우 안 원장과 문 이사장과의 양자대결 시 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두관 지사를 누르긴 했지만 그 차이는 불과 5%였다. 보고서는 박 위원장에 대해 “대세론은 유효기간이 지남. 지지율 회복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됨. 총선 공천 과정에서 발생할 당내 불만을 어떻게 수습하는지가 관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삼자구도’를 묻는 항목에선 박 위원장이 야권 후보들을 모두 앞섰다. 야권이 통합에 실패하면 박 위원장에게 유리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야권 분열은 대선 필패 공식이다. 이를 진보 진영에서도 잘 알고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야권의 경선은 ‘다이내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 대항마가 없어 ‘밋밋한’ 새누리당보단 훨씬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문 이사장에 대해 “총선 바람을 탈 경우 의외로 무난히 청와대에 입성할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권력의지가 약하다. 선거를 치러 본 경험이 없다”며 반신반의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야권 후보임엔 틀림없지만 그 상승세를 이어가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엔 야권에서 문 이사장을 탐탁지 않게 보는 세력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현재 지지율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안 원장에 대해서도 보고서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철수) 신드롬이 한풀 꺾였음. 박 위원장과의 양자대결은 물론 삼자구도에서도 지지율 하락세. 안철수 정체성과 본선 경쟁력에 대한 회의감 증가. 조직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 다만, 보고서는 안 원장이 이번 총선에서 일정 역할을 할 경우 또 다시 ‘안풍’이 재현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A 사는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대응책 마련에 착수했다. A 사 임원은 “지금까지 박 위원장과는 접촉이 있었지만 안 원장이나 김 지사 등과는 별로 없었다.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야권 후보들과의 관계 구축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면서 “대권 주자들과 연관이 있는 사내 임원들 파악은 이미 끝났다. 예를 들면 문 이사장의 경우 학연으로 집중 공략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향후 A 사는 박 위원장, 안 원장, 김 지사, 문 이사장에 대해 각각 25%씩의 비중을 두고 관리할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A 사 임원은 “예전엔 박 위원장을 집중 ‘마크’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마지막에 웃을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이 넷 중 한 명이 대권을 잡는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그룹들 역시 마찬가지다. A 사처럼 대권 보고서를 작성해 나름대로의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올해 들어 국회 주변에 대관 업무를 하는 대기업 직원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은 정치권 동향 파악과는 별도로 주요 후보들과 ‘핫라인’을 구축하는 데도 공을 들이고 있다.
정치권도 주요 그룹들의 대권 전략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의 정보력이나 판세 분석이 실제 선거에서 참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그룹이 작성한 보고서가 여의도를 중심으로 은밀히 나돈 바 있는데, 여기엔 ‘박근혜 위원장 집권 가능성은 제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 보고서를 접한 친박계 의원실 관계자는 “기분은 나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순 없다. 어떻게 보면 정치권에서 만든 것보다 객관적일 수 있다.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문제점을 고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이러한 기업들의 움직임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경유착’의 단면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A 사가 작성한 보고서 말미엔 “대권 후보가 자사의 장기적인 사업계획과 연관이 있는 공약들을 제시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해야 함”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특히 재계가 후보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돈이 건네질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몇몇 기업이 고초를 겪었다. 정치적인 배경 때문이었다. 공중 분해된 대우그룹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로서는 대선자금을 지원해주고 보험을 드는 것”이라면서 “돈을 주고 싶어서 주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