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할리우드의 아버지’ 토머스 인스.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
사실 미국 영화의 중심지는 서부의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동부의 뉴욕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토머스 에디슨의 연구소가 뉴저지에 있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심장부는 뉴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곧 LA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되고, 이른바 ‘할리우드’의 시대가 열린다.
할리우드의 개척자는 바로 제작자 토머스 인스였다. 정확히 100년 전, 그는 산타모니카 해안에 거대한 스튜디오를 짓고 자신의 이름을 따 ‘인스빌(Inceville)’, 즉 ‘인스의 마을’이라고 이름 붙였다. 단지 스튜디오만 지었다고 해서 그를 ‘할리우드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토머스 인스는 최초로 분업화를 이룬 혁신가였다. 그는 ‘콘티뉴이티(continuity)’, 즉 ‘촬영용 대본’을 개발해 영화 제작의 전 과정을 통제했고, (당시엔 비록 15분짜리 단편이었지만) 1년에 수백 편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생산성을 갖추게 되었으며, 다른 모든 스튜디오는 그의 방법을 따랐다.
당시 영화계의 거물이 토머스 인스였다면, 언론계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손 안에 있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30여 개 도시의 신문을 소유하고 있던 그는 옐로 저널리즘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기도 했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꼽히는 오슨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1941)은, 그 주인공인 찰스 포스터 케인이 허스트를 모델로 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는데, 이 영화가 개봉되자 허스트는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 헐뜯었고, 결국 <시민 케인>은 흥행에 실패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오슨 웰스의 고단한 영화 인생은 시작되었다.
▲ 요트 위에서 인스를 환영하는 허스트의 연인 데이비스. |
화려한 생일 파티를 끝낸 인스는, 소화불량인 것 같다며 요트에서 복통을 호소했다. 고통은 잦아들지 않았고, 그는 수상 택시로 요트에서 샌디에이고 부둣가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LA의 큰 병원으로 가려 했지만 증상이 악화되어 ‘델 마’(Del Mar)에서 내려 호텔로 갔다. 왕진 온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후 할리우드의 자택으로 돌아간 토머스 인스는, 11월 19일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요트를 떠난 지 48시간도 안 된 시간이었다.
여기까지가 인스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팩트’. 그가 죽은 다음 날 아침 <LA타임스>엔 “영화 프로듀서, 허스트의 요트에서 총에 맞다!??”라는 헤드 카피의 기사가 실렸지만 오후판에선 사라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조간 기사에 의하면 인스는 허스트의 목장에 방문했을 때 통증이 시작되었고 앰뷸런스를 타고 집으로 와 가족들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통증의 원인은 총상이라는 게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여러 개의 시나리오가 돌기 시작했고 루머의 핵심은 허스트가 실수로 인스의 머리에 총을 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시나리오는 이렇다. 허스트는 자신의 연인인 마리온 데이비스가 채플린과 내연의 관계라고 생각했고, 그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둘 다 초청했다는 것이다. 허스트는 배 한 구석에서 두 사람이 껴안는 것을 보았고, 그 광경에 총을 뽑아들자 데이비스가 비명을 질렀는데, 그 소리를 들은 인스가 객실에서 뛰쳐나와 말리던 중에 오발 사고로 총에 맞았다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었다. 원래 위궤양이 있던 인스가 파티 후에 진통제를 찾다가 데이비스를 만났는데, 그 광경을 채플린과 데이비스의 밀회로 오해한 허스트가 총을 쐈다는 거다. 갑판 아래에서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다투다가 총이 발사되었는데, 총알이 우연히 인스의 객실로 들어가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얘기도 있었다.
채플린의 비서인 코노 토라이치는 루머에 기름을 부었다. 샌디에이고 해안에서 ‘총상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인스를 봤다고 말한 것. 하지만 샌디에이고의 담당 검사는 인스와 동행했던 카슨 굿맨만 간단히 조사한 후 수사를 종결했고, 채플린은 요트에 탄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데이비스는 한참 후에 인스의 죽음을 알았다고 했다. 인스의 아내인 넬은 부검을 거부하고 재빨리 장례식을 치른 후 유럽으로 떠나 버렸다.
거대한 추모식까지 치러졌지만, 의혹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몇몇 정황들은 더욱 의심을 증폭시켰다. 당시 허스트의 신문 한 구석에 조그마한 칼럼을 쓰던 루엘라 파슨스가 사건 이후 허스트의 신문과 평생 계약을 맺었고 미국 전역에 기사를 제공하는 거물급 칼럼니스트가 된 것. 그녀는 사건 이후 인스의 죽음과 허스트는 무관하다는 기사를 꾸준히 생산해냈고, 그 기사는 허스트가 소유한 신문을 통해 재생산되었다. 허스트가 인스의 아파트 융자 대출금을 모두 갚았고, 인스의 아내인 넬에게 대규모 펀드를 제공한 후 유럽으로 보냈다는 얘기도 있었다.
숱한 의혹 속에 심장마비인지 허스트에 의한 타살인지 또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토머스 인스. 아직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이었던 D.W. 그리피스의 말이 진리인 듯하다. “수많은 의혹이 있으나 허스트는 너무나 거물이다.” 죽음마저 덮을 수 있는 거물의 존재. 미국의 ‘광란의 20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