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정말 ‘왕’ 같으신 다른 배우 분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런데 왜 나야, 싶었죠(웃음). 한편으로는 인조가 오히려 저한테 맞는 색깔의 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나 평범한 왕이었다면 배우로서 도전해보고 싶은 매력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꼽는 ‘올빼미’에서의 인조의 캐릭터적 매력은 인간으로서 너무나 바닥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끝까지 올라가려 하다 보니 반대로 더 바닥을 보여주는 거죠. 역할을 맡기로는 그런 점이 매력이었어요.”
11월 23일 개봉하는 영화 ‘올빼미’는 조선 인조 시대에 발생한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속 진실을 추적하는 스릴러 사극 영화다. 낮에는 맹인이지만 밤에는 희미하게 볼 수 있는 침술사 경수(류준열 분)가 어느 밤 소현세자(김성철 분)의 죽음을 목격하고, 진실을 파헤치려다 광기에 휩싸인 왕 인조와 대적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극 중 인조를 맡은 유해진은 사소한 의심이 광기로 비화하면서 폭주하는 인물의 감정 변화를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게 보여줬다는 극찬을 받았다.
“분노의 수위를 어느 정도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처음 청나라에서 사자가 궁에 와서 ‘청 황제 납시오’하는 신에서 처음 분노를 느끼고, 또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분노를 느끼지만 두 감정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어요. 제 생각만큼 표현되진 않았지만 가장 크게 분노한 지점은 아마 세자의 저 말을 들었을 때였을 거예요. 세자를 향해 ‘너 눈빛이 바뀌었구나. (청을) 벗으로 삼아?’라면서 분노하는데 이 장면이 바로 영화의 시발점이었던 것 같아요. 자신의 굉장히 치욕스러운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에 인조에겐 너무 큰 자극이었을 테니까요.”

“원래는 인조가 ‘짠’하고 나타나기로 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가진 익숙한 이미지가 있다 보니 그러면 대중들이 빵 터질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발 너머로 등장하게 된 거예요. 카메라가 천천히 다가오면서 발 너머의 인조를 보여주는데 저는 그 신이 관객이 제게 다가오는 속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저 발 뒤에 유해진이 있네, 왕 분장을 했네 하면서 대중들이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그냥 다른 배우였다면 ‘짠’하고 나타나도 괜찮았겠지만 그게 저였기 때문에 이런 준비가 필요했던 거죠(웃음).”
소현세자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이면서 인조와 대적하는 소경 침술사 경수 역의 류준열과 유해진은 영화 ‘택시운전사’(2017) ‘봉오동전투’(2019)에 이어 벌써 세 번째 같은 작품에서 만나고 있다. 유해진이 보여주는 광기어린 연기에도 휩쓸리거나 묻히지 않고 마지막 동이 틀 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류준열의 연기력은 유해진의 변신과 함께 평단의 호평을 쌍끌이로 이끌어냈다. 11월 10일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유해진 역시 류준열의 성장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들은 류준열이 눈물을 보여 이슈가 되기도 했다.

유해진은 이미 9월에 ‘공조2: 인터내셔날’로 관객들을 만났다. 관객수 690만 명 이상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을 넘으면서 한숨 돌리긴 했지만 ‘올빼미’의 개봉을 앞두고는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의 관객 수를 회복하기엔 요원해 보이고, 심지어 마블 스튜디오의 올해 마지막 대작인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와도 정면대결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높아진 티켓 값과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의 확대 등으로 ‘영화관용 영화’의 설 곳이 조금씩 좁아지고 있지만, 영화를 위한 배우로서 긴 시간 활약해 온 유해진은 “그래도 여전히 영화만이 가진 매력과 힘을 관객들이 알아주실 것”이라며 힘주어 말했다.
“다양한 OTT 매체에 영화가 설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될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영화가 가진 힘을 믿어요. 영화만이 가진 영화다움이라든지, 극장에서 봐야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요. 혼자서 호젓하게 보는 것도 좋지만 극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이 보다 보면 옆 사람들의 반응에 내가 따라가기도 하고 그런 재미가 있잖아요? 예컨대 나는 재미없게 보고 있는데 옆에서 웃으면 ‘어, 내가 지금 분위기를 못 따라가나?’ 싶어서 열심히 따라가는 척을 한다든지(웃음). 코로나19 이전으로 완전히 회복되는 데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렇게 영화가 가진 힘으로 새 살이 돋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