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클레오파트라>에 출연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이들은 이 영화를 인연으로 결혼했다. |
사실 에디 피셔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사이에 핑크빛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피셔의 아내인 데비 레이놀즈는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소문은 계속되었고 결정적인 계기는 레이놀즈가 새벽에 테일러가 묵고 있던 플라자 호텔 스위트룸에 전화했을 때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테일러가 아닌 피셔였다. 결국 피셔는 아내에게 “난 테일러와 사랑에 빠졌고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는 매몰찬 이별의 메시지를 전했다.
1959년 5월에 결혼한 피셔와 테일러. 약물 중독자였던 피셔는 테일러와 결혼하면서 가수 경력의 급격한 내리막길을 경험한다. 결국 그는 스타 마누라의 ‘가방모찌’(수행비서의 속된 표현) 신세가 되었다. 이때 테일러는 당시 할리우드 사상 최고 대작이었던 <클레오파트라>(1963)에 출연한다. 테일러가 병으로 쓰러지며 사경을 헤매면서 지연되었던 이 영화는 1961년 늦여름에 로마에서 촬영이 재개되었다.
이미 심각하게 제작비를 초과한 <클레오파트라>는 만약 흥행에 실패하면 제작사인 20세기 폭스가 파산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테일러의 고민은 그런 게 아니었다. 피셔와의 결혼 생활은 점점 공허해졌고 그는 좀 더 강한 남자를 열망하게 되었다. 이때 운명의 남자가 다가온다. 안토니우스 역을 맡았던 리처드 버튼. 유부남과 유부녀였던 그들 사이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고, 그렇게 ‘세기의 스캔들’은 막을 올린다.
1962년 1월에 그들은 결국 사랑에 빠졌다. 리처드 버튼이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테일러와의 관계를 끝내려 하자 그녀는 수면제를 집어 삼키며 자살을 시도했다. 사람들은 모두 테일러를 비난했다. 피셔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멀쩡한 가정을 파괴하려는 의도로 본 것이다. 통과되진 않았지만 미국 상원에선 그들의 입국을 금지하는 법안이 상정되었다. “나는 에디 피셔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날 필요로 했기에 결혼했을 뿐”이라며 테일러가 마음을 정리하는 동안에 버튼은 망설였다. 자폐 증세를 겪고 있던 딸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고뇌 속에 술에 빠져 지내던 버튼. 하지만 그는 결국 1963년에 테일러에게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8만 달러짜리 브로치를 건네며 프러포즈를 한다.
1964년 3월 6일에 에디 피셔와 이혼한 테일러는 열흘 뒤에 몬트리올의 리츠칼튼 호텔에서 버튼과의 결혼식을 올렸다.
수천만 달러의 재산을 지녔던 그들의 삶은 사치 그 자체였다. 100만 달러짜리 전용기인 ‘더 엘리자베스’를 비롯해 50만 달러짜리 헬리콥터, 100만 달러짜리 요트, 내부에 바가 설치된 롤스로이스 자동차 등등. 특히 버튼은 테일러에게 어마어마한 보석을 선물하곤 했는데, 69.4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는 100만 달러가 넘었고 44캐럿짜리 다이아몬드 하나는 30만 5000달러였다. 하지만 술고래 부부는 점점 알코올에 빠져 들어갔고 상상 속의 질병에 시달리던 테일러는 약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그들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를 포함해 8편의 영화에서 함께했고 1973년엔 TV 영화 <이혼 (Divorce His-Divorce Hers)>에서 천문학적 금액을 받았다. 하지만 결혼 10년차에 접어들던 그 시기에 그들은 별거 상태였다. 자신들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작품에 큰돈을 받고 출연한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은 지나친 돈벌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그들은 1974년 6월에 ‘1차 이혼’을 했고, 버튼은 “아마도 우리가 너무 사랑하기에 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마음속에서 항상 같이 있을 것이며 삶과 죽음만이 우릴 갈라놓을 것”이라는 말로 여운을 남겼다.
이혼 후 버튼은 유고슬라비아의 공주와, 테일러는 헨리 와인버그라는 네덜란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테일러는 비벌리힐즈에서 동거를 시작했고 와인버그는 테일러와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버튼과 테일러는 1975년 10월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에서 재혼했고, 버튼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테일러에게 7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다.
하지만 그들의 애정운은 두 번의 결혼으로도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이혼한 지 1년 4개월 만인 1975년 10월에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 그들은 채 1년도 못 된 다음해 8월에 ‘2차 이혼’을 했다. 그들은 두 번째 결혼 생활 기간 동안 각자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버튼은 27세의 모델 수전 헌트와, 테일러는 사업가인 피터 다매닌과 사귀게 된 것. 버튼은 테일러와 헤어진 지 몇 주 후에 헌트와 결혼했다. 이후 버튼은 1983년에 헌트와 헤어지고 영화 제작 일을 하는 샐리 헤이와 결혼하지만 다음 해인 1984년에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원인은 매일처럼 마셔대는 술이었다. 죽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면 테일러와의 짧은 재회. 그들은 1983년에 노엘 카워드의 희곡인 <사생활> 무대에 함께 섰다.
버튼과 헤어진 후 테일러는 1976년에 정치가인 존 워너와 결혼했지만 1982년에 헤어진다. 이후 약물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들어간 갱생원에서 만난 전직 트럭 운전사 래리 포텐스키와 1991년에 결혼했지만 5개월 후 헤어졌다. 이후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고, 2011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