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마구치가 미국에 진출해 촬영한 영화 <대나무집>. 그녀는 기모노를 입고 미국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했다. |
1930년대 일본은 만주국을 세웠고 이 시기 많은 중국인들이 친일 행위를 했다. 하지만 2차 대전과 함께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고 중국인들은 당시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였던 리샹란(李香蘭)도 예외일 순 없었다. 가수로 시작해 연기자로 옮겨간 그녀는 대표적인 친일 영화인이었다. 일본은 1938년에 중국에 ‘만주영화협회’라는 영화사를 설립해 당시 18세였던 (‘리코란’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기도 했던) 리샹란에게 뮤지컬을 제의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영화 경력은 시작된다.
리샹란은 주로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의 로맨스를 그린 이국적 정취의 영화에 출연했다. 중국 여인으로 등장한 그녀는 언제나 일본군 장교와 사랑에 빠졌고, 만주영화협회와 일본의 도호 영화사가 합작하고 그녀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전시 일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작은 <중국의 밤>(1940). 여기서 그녀는 남루하지만 도도한 중국인 고아로 출연한다. 상하이 거리에서 어느 일본 장교를 만난 그녀는 순종적이며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변해간다. 일본의 관객들은 이 영화의 할리우드적 로맨스에 매료되었고 전시 일본의 억압적이며 금욕적인 분위기로부터 일시적인 해방감을 맛보았다. 이처럼 일본의 군국주의는 러브 스토리로 변형되었다.
결국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사형 집행 일주일 전 법정엔 서류 한 장이 배달된다. 그녀의 출생 증명서였고, 거기엔 리샹란이라는 이름 대신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라는 일본 이름이 있었다. 중국인으로 활동했으며 일본인들마저 그녀를 중국인으로 여겼지만, 사실 그녀는 일본인이었던 것. 석방된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는 1946년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찌 보면 그 사연은 간단하다. 군국주의로 미쳐가던 일본이 조선을 삼키고 만주로 손을 뻗치던 시기 푸순 지역에서 야마구치 요시코가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계 철도회사 직원이었다. 1920~30년대 푸순은 다문화 도시였고 야마구치는 모국어인 일본어를 비롯해 중국어와 러시아어에도 능통하게 된다. 이후 베이징의 미션 스쿨에 다니며 영어를 배웠으니 그녀의 다국적 인생은 아마 어린 시절에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폐 질환을 앓았던 야마구치는 폐활량 강화를 위해 성악을 배웠다. 당시 일본은 무력으로 만주국을 세운 뒤 중국인 계도를 위해 라디오 방송을 준비하던 상황이었다. 야마구치의 성악 교사는 학생들을 모아 조촐한 발표회를 열었는데, 우연히 그곳을 찾은 방송사 직원이 야마구치를 발탁했고 그녀는 ‘만주신가곡’(滿洲新歌曲)이라는 노래로 데뷔한다. 이때부터 사용한 이름이 바로 ‘리샹란’. 아버지의 친구이자 그녀의 대부이기도 한 금융인 리지춘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배우뿐만 아니라 가수로도 리샹란은 레전드가 되었다. 1941년에 나온 ‘소주야곡’(蘇州夜曲) 같은 영화 삽입곡은 유럽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고 ‘하일군재래’(何日君再來, 님은 언제 오시려나) ‘야래향’(夜來香, 달맞이꽃) 같은 노래는 중화권을 알리는 전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내는 앨범마다 그녀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그녀는 제국주의 일본군을 위해 숱한 위문공연을 다녔다. 한국에서 제작된 친일 영화 <너와 나>(1941)에 출연하기도 했다.
전후 일본 사회는 미군정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그녀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일본 영화사들의 시장 개척 정책에 의해 할리우드로 진출했는데 이때 그녀도 미국으로 건너간 것. 이 과정에서 그녀는 셜리 야마구치(Shirley Yamaguchi)로 거듭났다. 킹 비더의 <일본인 전쟁 신부>(1952), 사무엘 퓰러의 <대나무 집>(1955) 등에 출연한 그녀는 과거엔 일본군의 연인이었지만 이번엔 미군의 연인이 되어 기모노를 입고 미국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했다.
‘일본의 주디 갤런드’라는 애칭을 얻은 그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샹그리라>에 출연했고 채플린과 교분을 맺어 <라임라이트>(1952)의 삽입곡인 ‘Eternally’를 일본어와 중국어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1952년 일본계 미국인이며 저명한 건축가인 16세 연상의 이사무 노구치와 결혼한 그녀는 1957년에 이혼했고, 다음 해 일본의 외교관인 오가타 히로시와 재혼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해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는 1974년엔 자유당 소속으로 참의원(상원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1992년까지 몇 번에 걸쳐 재선되었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중국인들에게 눈물로 사죄했다. 그녀는 중국의 한 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너무 나이가 어려서 일본 군국주의에 이용당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중국 정부의 관리들이 계신 앞에서 사죄를 표합니다.”
세 개의 이름을 가졌던 여인의 삶은 아름다운 고해성사로 이어진 셈이며, 올해 82세가 된 노인은 아직도 반성의 삶을 살고 있다.
김형석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