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롼링위. 아직 봉건주의적인 관습이 많이 남아있던 시대에 그는 남편에 착취당하고 사회에 유린당한 불운한 여인이었다. |
1935년 3월 7일 저녁 롄화(聯華) 영화사의 한 연회. 그 자리는 아직 무성 영화 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중국 영화계에겐 중요한 자리였다. 미국의 음향 기사인 스키너를 초대한 그 자리엔 유성 영화를 계획했던 롄화 영화사의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비단 꽃무늬 치파오를 입은 롼링위는 밝은 모습으로 파티를 즐겼고, 최근작 <신여성 新女性>(1934)에서 공연했던 아역 배우에게 입맞춤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세 통의 수면제를 죽에 섞어 삼켰다. 30분 후에 남편인 탕지산(唐季珊)에게 발견되었지만 달려간 병원엔 당직 의사가 없었다. 의사는 새벽 5시가 되어서야 달려왔고, 자살 시도 4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6시 38분 당대 최고의 여배우 롼링위의 심장은 영원히 멈추었다. 그녀의 나이 25세. 그녀의 부고를 들은 10만 여 명의 팬들이 3일 동안 조문 행렬을 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나.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선 꽤 긴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봉건주의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사회적 분위기, 급성장한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옐로 저널리즘 그리고 그녀가 선택했던 잘못된 로맨스 등 롼링위의 죽음엔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있었다.
롼링위는 1910년 4월 26일 상하이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다섯 살 때 아버지는 폐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당시 상하이의 이름 난 부자인 장 씨의 집 하녀로 들어가 생계를 이었다. 바로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장 씨에겐 네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장후이충(張慧沖), 차남인 장칭푸(張晴浦), 삼남인 장후이민(張慧民)은 모두 장차 영화계에서 일하게 되는 인물들. 장다민(張達民)은 전형적인 부잣집 천덕꾸러기 막내였는데 그의 눈에 ‘하녀의 딸’인 롼링위가 들어왔다. 당시 그녀는 15세의 학생. 21세의 장다민은 순진한 그녀를 유혹했고 롼링위는 학교를 그만두고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던 롼링위는 사실은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았던 장다민의 다정함에 속아 넘어갔다. 이때 4형제 중 장남인 장후이충이 그녀에게 영화사 오디션을 제안했다. 열여섯 살 소녀는 그렇게 영화배우가 되었다.
장다민은 전형적인 한량이었고 부모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온갖 유흥을 즐기며 도박에 빠져 지냈다. 사실 롼링위와 정식 결혼을 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기혼자에게 더 많은 몫의 유산이 돌아가기에 장다민은 상중에 황급히 식을 올렸고 그렇게 상속받은 재산을 들고 도박장으로 달려갔다. 급기야 롼링위가 번 돈까지 탕진한 그는 장모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롼링위가 별거를 요구할 때마다, 영화사에 가서 난동을 부려 영화를 못 찍게 하고 언론에 동거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때 그녀는 수면제 한 통을 모두 삼키며 첫 번째 자살 시도를 한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고도춘몽 古都春夢>(1930)으로 완전히 스타덤에 올랐던 롼링위는 이 영화의 쑨위(孫瑜) 감독으로부터 “그녀의 천재적인 연기는 중국 무성 영화 시대의 긍지”라는 격찬을 받기도 했고 ‘빅3’에 드는 톱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1931년 그녀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경쟁자이자 절친이었던 여배우 후뎨(胡蝶)가 파혼 사건에 휩싸인 것. 결국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진 그녀의 재판에 1000여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으며, 옐로 저널은 수많은 선정적 기사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톱스타였지만 은밀한 동거 생활을 하던 그녀는 자신의 사생활이 법적, 공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맞이할 비극을 시뮬레이션처럼 접한 셈이었다. 이때 비열한 장다민은 “나는 너를 후뎨처럼 만들 수도 있다”며 롼링위를 협박했다.
금품 갈취와 폭력을 견디지 못했던 롼링위는 위문 공연 때 알게 된 군 장교를 통해 장다민에게 상하이에서 꽤 멀리 떨어진 푸젠성의 세무서 소장 자리를 얻어주었다. 그를 떠나보낸 롼링위는 변호사를 선임해 장다민과는 그 어떤 법적 관계도 아님을 확실하게 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상하이의 갑부이자 영화계에도 투자를 했던 탕지산이 그 주인공이었다. 오랜만에 상하이를 찾은 장다민은 동거 청산 합의서를 작성하며 2년 동안 매달 100원의 생활 보조비를 받기로 약속했다.
장다민을 벗어난 롼링위는 행복해졌을까? 그런데 열 살 정도 많았던 탕지산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사실 본처가 있는 상황에서 롼링위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바람을 피웠고 영화 촬영 이외의 시간엔 롼링위가 집에 있기를 바랐다. 일종의 의처증이었고 촬영이 지연되어 집에 늦게 돌아오는 날엔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 폭력도 심심찮게 휘둘렀다. 롼링위가 술에 입을 댄 건 이때부터였다. 연기자로서는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녀의 삶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