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세에 죽음을 선택한 중국 무성영화 시대의 꽃, 롼링위. 그녀가 남긴 유서마저 남편에 의해 왜곡되고 이용당했다. |
장다민(張達民)과 헤어지고 탕지산(唐季珊)과 동거 생활을 시작한 롼링위의 삶은 여전히 행복하지 못했다. 장다민이 롼링위에게 항상 돈을 뜯어내는 데 혈안이었다면, 탕지산은 그녀를 소유물로 여겼고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함께 살면서도 꾸준히 바람을 피웠다. 그런 면에서 롼링위의 유작이 된 <신여성 (新女性)>(1934)은 의미심장하다(그녀가 마지막으로 촬영하고 있었던 영화는 <국풍 (國風)>이었으나, 이 영화 촬영 중에 자살했다. 완성된 영화로는 <신여성>이 마지막 작품이다).
차이초성(蔡楚生) 감독이 연출한 <신여성>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그 주인공은 아이샤(艾霞). 여배우 겸 작가였던 그녀는 1930년대 중국 사회에서 자립적인 여성으로 살려고 애썼지만 남성 중심적 사회의 압박과 편견은 대단했고, 결국은 ‘사회적 타살’이나 마찬가지인 자살을 했다. 이 영화에서 롼링위는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며, 캐릭터에 완전히 빙의했다. 아이샤의 삶은 자신의 삶과 본질적으로 같았던 것. 영화가 개봉된 지 2년 만에 롼링위가 세상을 뜨자, <신여성>이 그녀에게 죽음의 계시를 주었다는 얘기가 나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특히 이 영화는 당시 중국의 옐로 저널리즘이 아이샤를 어떻게 비인간적으로 몰아갔는지 냉혹하게 보여주는데, 개봉 당시 기자 조합에서 항의해 감독과 제작자가 사과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롼링위의 죽음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법적 분쟁이었다. 탕지산과 동거하면서 롼링위는 전 동거인인 장다민에게 2년 동안 매달 100원의 생활비를 주는 것으로 합의를 했는데, 1935년에 장다민은 갑자기 남은 5개월치인 500원을 한꺼번에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탕지산과 동거하기 위해 이사를 가면서 가지고 나간 살림살이가 자신의 소유라며 2000원을 더 요구한다. 이에 탕지산은 변호사를 선임했고, 송사에 휘말리기 싫다는 롼링위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장다민을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기자들에게 장다민의 악행을 까발렸다. 이에 장다민도 소송을 걸었고, 롼링위는 법정에 서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공판이 있던 날 증인석에 선 롼링위를 보기 위해 방청객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고, 결국 판사는 재판을 미뤄야 했다. 이때 가장 신나게 롼링위를 공격한 사람들은, <신여성>에서 사악하게 묘사되면서 앙심을 품었던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실과 무관하게, 거의 소설에 가까운 기사를 무책임하게 지어내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롼링위는 법정에 나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했다. 지인에게 “나는 충분한 증거가 있고 무죄임을 밝힐 수 있다. 그러나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들은 정말 들을 수 없다”고 말했던 그녀는 그렇게 25세의 인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가장 당황한 사람은 장다민과 탕지산이었다. 탕지산은 음독 후 30분 만에 발견했음에도 적절히 응급조치를 못 했다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단 부고 기사를 내고 장다민 때문에 죽은 것이며 진정한 사랑은 자신뿐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공개한 유서엔 “인연이 있다면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자. 나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구절이 있었고, 유서의 “사람들의 소문이 두렵다”(人言可畏)라는 구절은 후세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장다민은 마치 자신이 순애보의 남자인 것처럼 쇼를 했고, 이후 죽은 롼링위를 팔아 돈을 벌었다. 롼링위의 삶을 소재로 한 연극 무대에 올라 그녀를 칭찬하는가 하면, 그의 셋째 형이자 영화감독인 장후이민(張慧民)이 롼링위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땐 사적인 에피소드를 제공하며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롼링위의 죽음을 애통한 척했던 탕지산은 얼마 있지 않아 재혼했고, 꾸준히 바람을 피우다 사업 실패 끝에 처량하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탕지산이 공개했던 롼링위의 유언장이 가짜인 것이, 66년 만인 2001년에 밝혀진 것이다. 드디어 밝혀진 진짜 유서엔, 두 남자에 대한 롼링위의 증오가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장다민에게 쓴 유서는 “나는 당신이 괴롭혀서 죽는다”고 시작하고 있었고, 탕지산에게 쓴 유서는 “내가 없어지니까 이젠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다. 나 역시 매우 기쁘다”는 서늘할 정도로 냉소적인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사실 그녀와 진정 마음이 통했던 사람은 <신여성>에서 작업했던 차이초성 감독이었다. 그들은 촬영 기간 동안 내연의 관계였고, 롼링위는 그에게 함께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가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이초성은 그러지 못했다.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차이초성이 용기를 냈다면, 가정의 속박을 벗어나 진정한 사랑이었던 롼링위와 함께 도피했다면, 세기의 스캔들이 터지긴 했겠지만 롼링위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