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의 제임스 딘’으로 불리며 청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리버 피닉스. 불과 스물세 살의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사망해 팬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
리버 피닉스에게 풍기는 자유의 느낌은 그의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히피였고 리버 피닉스는 학교 교육과 무관하게 부모와 함께 ‘신의 자녀들’(children of God)이라는 대항 문화적인 종교 집단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리버(1970년생)를 장남으로 레인 피닉스(1972년생), 와킨 피닉스(1974년생), 리버티 피닉스(1976년생), 서머 피닉스(1978년생) 등 다섯 명을 낳은 그들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매우 무능했지만 자녀들에 대한 확고한 비전은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모두 엔터테인먼트 쪽 일을 하길 바랐는데, 이것은 아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히피적 신념과 사고방식을 대중에게 전파하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리버 피닉스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역할을 했다. 여동생 레인과 함께 일곱 살 때부터 길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었다. 이후 TV와 CF 일을 거쳐 1982년부터 배우로 활동한 그는 스티븐 킹 원작의 <스탠 바이 미>(1986)로 유명해졌고 <모스키토 코스트>(1986) 때는 15세였던 마사 플림턴과 공연하며 사랑에 빠졌다. 이후 <허공에의 질주>(1988)로 오스카 후보에 오르고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1989)으로 블록버스터 흥행 배우가 되었으며, 스무 살에 찍은 <아이다호>(1991)로 방황하는 청춘의 심벌이 되었다.
그는 철저한 채식주의자였고 가죽 제품을 절대 입지 않았다. 로고 부분이 가죽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리바이스 청바지 CF를 거절할 정도였다. 우림 지역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한 나머지 코스타리카 지역에 수많은 밀림을 구입해 개발을 막기도 했다. 그에겐 청정 지역 같은 이미지가 있었고 마약이나 알코올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코카인 같은 마약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헤로인도 해본 적이 없다. 15세 때 처음 술을 마셔 봤지만 전혀 흥미를 못 느꼈고 지금까지 술을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스물두 살이 되던 1992년 그는 조금씩 변한다. 일단 그는 배우로서 은퇴 선언을 했다.
LA를 떠나 플로리다로 돌아간 리버 피닉스는 동생 레인과 ‘알레카스 애틱’(Aleka’s Attic)이라는 밴드를 조직해 음악 활동을 했다. 이후 다시 연기를 시작했을 때는 상업 영화와 완전히 거리를 두었는데, <사랑이라 부르는 것(The Thing Called Love)>(1993)을 찍을 때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가 촬영 내내 약에 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LA의 약물 중독자 치료 모임에 한두 번 나가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중독 상태를 부인했다. 그리고 1993년 그는 <다크 블러드(Dark Blood)>라는 영화를 찍게 됐다. 사막에 살면서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남자 역을 맡았는데 유타 사막의 촬영을 마치고 LA로 와 스튜디오에서 실내 장면을 찍었다. 마지막 장면은 그가 죽는 신이 될 예정이었다.
1993년 10월 30일 그날의 촬영을 마친 리버는 숙소인 니코 호텔(현재는 SLS 호텔)로 돌아와 동생 레인과 와킨, 그리고 여자친구인 서맨더 매티스와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할리우드 힐스에 있는 ‘바이퍼 룸’이라는 클럽으로 이동했다. 조니 뎁이 운영하고 있던 이곳에서 그는 무대에 설 예정이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베이시스트 플리와 절친이었던 리버. 그가 클럽에 도착했을 땐 조니 뎁과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무대에 있었다.
이때 이미 리버는 약에 취해 있었다. 화장실에서 그는 헤로인과 필로폰을 섞은 이른바 ‘페르시안 브라운’(Persian Brown)을 코로 흡입한 후 진정하기 위해 발륨을 복용했고, 곧 구토를 했다. 잠깐 정신을 잃은 후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며 동생 와킨의 부축을 받아 바깥으로 나간 리버는 길에 쓰러져 보도블록에 머리를 부딪쳤다. 발작이 시작되었고 동생 레인은 인공호흡을 했다. 전화를 받고 의료진이 도착했을 때 이미 심장 기능에 문제가 생겼고, 이때가 새벽 1시 10분이었다. 그리고 41분 뒤 그는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10월 31일, 핼러윈 새벽이었다.
검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혈액에서 진정제인 디아제팜(diazepam)이 발견됐다. 그가 헤로인 때문에 상태가 안 좋아지자 클럽 안의 누군가가 권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헤로인의 작용을 더 촉진시켰다. 감기나 천식 치료제인 에페드린(ephedrine)도 발견됐다. 아마도 숨 쉬기가 곤란해졌을 때 복용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마리화나와 발륨, 코카인과 헤로인 그리고 모르핀까지, 그의 몸은 온갖 약물로 피폐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리버 피닉스가 왜 갑자기 마약 중독자가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비참한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는지 추정하기 시작했다. 경쟁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이 그를 점점 냉소적으로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었다. 혹자는 평범하지 않았던 유년기부터 형성된 반항심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말했다. 리버 피닉스는 내면의 악마성에 점점 깊게 파고들었고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지금 살아 있다고 해도 4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을 ‘제2의 제임스 딘’이라는 평가가 전혀 호들갑이 아니었던 청춘스타 리버 피닉스. 그의 죽음은 스타와 약물 중독 사이의 비극적 커넥션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이 됐다. 그리고 그 우울한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