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미활동위원회의 청문회 풍경. |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 미국은 그렇게 대립각을 세우던 관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가장 큰 적은 독일의 나치였고 미국 내에서 공산당은 (지금도 그렇지만) 합법적인 정치적 집단이었다. 미국 내에서 국익을 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반미활동위원회(House on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즉 HUAC이 1938년에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위원회는 나치 성향의 그룹을 감시했고, 의장이었던 민주당 하원의원 마틴 디아즈의 첫 업적은 미국 내 독일 영사관 폐쇄였다. 하지만 독일과 소련이 1939년에 불가침 조약을 맺으면서(결국 그 조약은 2차 대전 때 깨지지만) 독일과 동맹 관계인 소련도 적으로 간주되었고, ‘빨갱이 사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장 좋은 타깃은 할리우드였다. 영화인들은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고, 공산당원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대공황 시절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했고 이 시기 꽤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이다. 게다가 공격 목표로 할리우드만큼 선전 효과가 좋은 대상도 없었고, HUAC의 디아즈 의장은 “영화엔 대중들의 정치적 견해를 바꿀 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장 먼저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사람은 두 번이나 오스카 후보에 올랐던 시나리오 작가 존 하워드 로슨이었다. 그는 위원회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고 주장한 후에 풀려날 수 있었다. 다음 타깃은 배우였다.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 갱스터 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그리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1931)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로 오스카를 두 번이나 수상했던 프레드릭 마치 등이었는데, 그들은 증거 자료를 제출하고 일단 조용히 넘어갔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 냉전 시대가 찾아왔다. HUAC은 임시가 아닌 상임위로 바뀌었고, 할리우드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PCA, 즉 ‘미국의 진보적 시민들’(Progressive Citizens of America) 같은 단체가 공격받았다. 존 휴스턴 감독을 비롯 캐서린 헵번, 에드워드 G. 로빈슨, 그레고리 펙, 진 켈리 같은 배우가 참여했던 PCA에 대해 HUAC의 새 의장인 공화당 상원의원 J. 파넬 토머스는 “공산주의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할리우드 내부에서 먼저 잔꾀를 냈다. 미국 영화산업의 권익을 대변하는 ‘미국영화연합’(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 MPAA)의 회장인 에릭 A. 존스턴이 할리우드가 기꺼이 공산주의자 색출에 협조할 거라고 밝힌 것.
1947년 10월 25일, 미 상원 의회에서 HUAC의 청문회 열렸고 몇몇 영화인들이 증언을 했다. 미국적 가치의 상징이었던 게리 쿠퍼는 “나는 <자본론>은 본 적도 없고, 공산주의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는데 그 정도면 양반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동료들을 고발했다. <애수>(1940)로 유명한 로버트 테일러는 동료 배우 하워드 다 실바가 “평소에 삐딱했다”고 말했는데, 다 실바는 이후 8년 동안 영화에 출연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월트 디즈니는 “만화영화노조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이 내 스튜디오를 접수하려 했다”는 근거 없는 발언을 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3)의 샘 우드 감독은 우익 단체를 조직했으며 1981년에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은 동생과 함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 할리우드 텐 중 법정 모독죄로 걸린 9명. |
세상은 급격히 한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50명의 영화제작자들은 맨해튼의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 비밀리에 모여 ‘할리우드 텐’은 고용하지 않기로 결의했고 그들 외에도 의심할 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서로 대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영화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공 진술서에 서명을 해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할리우드 텐’의 일원이었던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이었다. <십자포화>(1947) 같은 영화에서 미국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며 오스카 감독상 후보에 올랐던 ‘용감한 영화인’이던 그는 1950년 감옥에서 나온 후 다시 할리우드에서 일하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했다. 그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 제목은 ‘무엇이 할리우드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는가?’였다. 일종의 전향 확인서인 셈이었고 그는 1952년에 업계에 복귀해 1954년에 <케인 호의 반란>으로 흥행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서막에 불과했다. 당시 마녀 사냥의 광풍에 휩싸였던 할리우드는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2편에 계속)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