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40년대 할리우드 스타덤의 강력한 일원이었으며 오스카 위너였던 조앤 크로포드의 괴물 같은 모성애는 어쩌면 그녀의 운명이자, 한편으로는 잔혹한 의지였다. 스타로 성공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그녀에게, 아이는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존재였고, 모성애는 캐릭터를 위한 설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과 연애 편력 속에서 그녀의 욕망은 이상하게 뒤틀려가고 있었다. 더욱 슬픈 건, 자신의 행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아이들에게 반복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앤 크로포드는 성적으로 매우 거칠고 위험한 유년기와 틴에이저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가정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났고, 어머니 애너는 아들 할과 딸 루실(조앤 크로포드의 출생명은 ‘루실 페이 레수에르’다)을 데리고 오클라호마로 가, 그 지역에서 오페라 하우스를 경영하는 해리 카신이라는 남자와 재혼했다. 루실은 어릴 적부터 성숙한 외모와 몸을 지니고 있었는데, 11세 때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당장 이혼을 했다.
이혼 후 다시 궁핍한 생활로 돌아가게 되자, 루실의 어머니는 엉뚱하게도 딸을 가난의 원인 제공자로 몰아 구박했다. 떠돌이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고, 캔자스시티에서 허름한 모텔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시절, 그녀는 오빠 할과 근친상간에 빠진다. 어머니는 그 책임을 동생인 루실에게 물었다. 학창 생활도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학비를 벌기 위해, 학업보다 아르바이트에 더 힘써야 했다. 어머니 밑에서 노예 같은 삶을 살던 그녀의 고통은 15세 때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끝나는가 싶었지만 그녀는 지독한 ‘왕따’가 되었다. 다른 학교로 옮겼지만, 그녀는 학교 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이른바 ‘근로 학생’이었고, 결국은 자퇴했다.
지독한 가난과 성적 혼란과 열등감으로 휩싸인 틴에이저 시절을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돌파구는 로맨스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캔자스시티로 돌아온 그녀는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동네의 어느 친절한 청년과 첫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동성애자였고 결국 첫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로 끝나고 말았다. 혹자는 이때 로맨스가 트라우마를 남기면서 그녀의 성 정체성을 바이섹슈얼리티로 만들었다고도 이야기하는데 배우 시절 조앤 크로포드는 주디 갤런드, 바바라 스탠윅, 클로데트 콜베르, 마릴린 먼로 등의 은밀한 연인이었다.
보드빌 쇼의 댄서에서 나이트 클럽의 코러스 걸이 된 그녀는 한때 매춘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녀의 유일한 목표는 ‘성공’이었고, 그것을 위해선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다. 브로드웨이로 진출했을 때, 그리고 할리우드로 왔을 때, 그는 무대와 스튜디오의 ‘보스’들이 원할 땐 언제나 응했다. 1925년에 엑스트라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녀가 다음 해에 주연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총 네 차례 결혼했지만, 그녀에게 결혼도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스타 가문의 자손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결혼한 것도, 그녀의 연기력을 끌어올렸던 동료 연기자 프랜코트 톤과 결혼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필립 테리라는 무명 배우와 결혼한 건 싱글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전략에 불과했다. 그러기에 조앤 크로포드는 결혼 생활과 무관하게 로맨스를 즐겼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살 때도 클라크 게이블과 스캔들을 일으켰고, 줄잡아 30여 명의 배우와 감독이 그녀의 품을 거쳤다.
스타덤에 올랐지만 ‘쎈’ 이미지 때문에 만만치 않은 안티가 있었던 조앤 크로포드는 1930년대 말에 아기를 가짐으로써 이미지를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잦은 낙태와 유산으로 임신은 힘들었고, 입양을 하려 했지만 완고한 캘리포니아 법정은 당시 이혼 후 싱글 상태였던 조앤에게 입양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때 알았던 갱 보스 메이어 랜스키를 통해, 1940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크리스티나를 입양했고, 4년 후 크리스토퍼를 입양했다. 1947년엔 캐시와 신디 두 딸을 입양했는데, 누가 봐도 안 닮은 두 아이를 쌍둥이라고 사람들에게 우겼다. 조앤 크로포드는 ‘행복한 가정’의 판타지를 완성하기 위해 하얀 푸들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후 공식석상에 아이들과 함께 나타나는 조앤의 이미지는 ‘슈퍼맘’의 표상이었다.
그 이미지를 유지하고, 대중들에게 ‘잘 훈육된 아이들’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조앤 크로포드는 네 명의 자녀들을 철저한 가이드 라인 안에서 훈련시키듯 키웠다.
더 무서운 건, 그녀는 딸과 적대적으로 경쟁했다는 사실이다. 크리스티나가 연기자로 데뷔해 1960년대 말에 TV 드라마 <시크릿 스톰 The Secret Storm>으로 인기를 얻을 때였다. 크리스티나가 수술로 출연이 불가능해졌을 때, 조앤 크로포드는 35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나가 맡았던 역할을 대신해 드라마에 출연했다. 아들인 크리스토퍼와도 냉랭한 관계였는데,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크리스토퍼가 인사차 집에 들르자 내쫓은 일은 유명하다.
그녀의 오랜 동료이자 크리스티나의 대모였던 배우 헬렌 헤이즈는 이렇게 말한다. “난 조앤 크로포드가 엄마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악마적 모성애의 소유자 조앤 크로포드, 1981년엔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사랑하는 어머니>가 만들어져, 최악의 영화를 선정하는 래지 어워즈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페이 더너웨이)을 비롯해 5개 부문을 휩쓸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