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 사회의 핫 이슈 중 하나는 오바마 대통령의 동성 결혼 지지 발언이다. 어떤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는지는 두고서라도, 미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가장 첨예한 잣대인 동성애에 대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긍정적인 견해를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비판이든 지지든, 최근엔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호모섹슈얼리티. 하지만 이 단어는 한동안 금기어 같은 것이었으며, 보수적 사회 속에서 엔터테이너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대중 뮤지션이자 쇼맨이었던 ‘리버라치’가 대표적인 인물. 그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대중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지 못했다.
1919년 이탈리아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리 리버라치(Lee Liberace)는 네 살 때 음악을 들으면 곧장 피아노로 연주했던, 꽤나 신동 소리 듣던 인물이었다. 그는 조금은 다른 아이였는데 또래 아이들과 뛰어 놀기보다는 요리와 바느질과 탭댄스를 좋아했고 언제나 음악 속에서 살았다. 첫 무대는 14세 때. 바이올리니스트인 형 조지와 함께 살롱에서 연주했다. 그가 남성에게 관심을 보인 건 이 즈음부터였다. 학교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그는 16세 때 프로 풋볼 선수로부터 유혹을 받았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기에 죄의식이 있긴 했지만,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순 없었다.
1940년대에 뉴욕으로 진출한 그는 클래식에서 대중음악으로 선회하며 승승장구했고 1949년엔 <사우스 시 시너 South Sea Sinner>에 부둣가 살롱의 피아니스트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진출했다. 1950년대에 시작된 <리버라치 쇼>는 미국 전역에 방송되며 그를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만들었다. 팝과 클래식의 명곡들을 화려한 스타일로 연주하던 그의 모습은 특히 중년 이상의 아줌마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커다란 미소, 카메라에 대고 연신 윙크를 해대던 큰 눈, 건반 위를 날아다니던 손놀림과 손가락의 화려한 반지들, 연주 사이에 쉬지 않고 던져대는 멘트들. 그에겐 ‘미스터 쇼맨십’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적들도 생겼다. 남성 시청자들은 그를 역겹게 여겼다. 게이설이 흘러나온 것도 이 즈음이었는데 그의 에이전트는 코러스 걸이었던 조앤 리오를 연인으로 만들어 결혼 발표까지 시키면서 대처했다. 리오와 헤어진 후엔 중년의 스케이팅 스타였던 소니아 헤니를 연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고, 2단계 대처 방안은 소송이었다. 그 시작은 1956년 영국이었다. 공연차 런던에 도착했을 때 <데일리미러>라는 신문에서 그의 음악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걸고 넘어지며, 우회적이지만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내용으로 그가 게이임을 주장했다. 리버라치는 곧장 소송을 걸었고 그의 바쁜 일정으로 1959년까지 미뤄진 재판에서 그는 승소했다. 그는 법정에서 “동성애적 행위에 끌린 적이 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동성애에 반대합니다. 그것은 관습에 어긋나는 반사회적 행동입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선 <컨피덴셜>과 소송이 붙었다. 리버라치가 오하이오의 한 호텔에서 홍보 담당자를 동성 강간하려 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소송이었고, 리버라치는 또 승리해 4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냈다. 물론 이 기간에도 LA 교외 저택의 피아노 모양 수영장에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리버라치의 게이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리버라치와 어울렸던 게이들은 그가 법정에서 동성애를 비난하며 승리를 거둘 때마다 좌절했다. 유명인의 커밍아웃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가 조금이나마 넓어지길 바랐던 것이다.
리버라치의 세 번째 소송은 1982년에 있었다. 그는 근육질의 금발 청년을 좋아했고, 마음에 드는 사람은 수행원으로 고용하곤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리버라치보다 39세 어린 스콧 토슨이라는 청년이었다. 리버라치와 비슷하게 성형 수술을 할 정도로 리버라치를 무척 따랐던 토슨은 그의 보디가드 겸 리무진 운전수로 일했다. 하지만 버림받은 뒤 그는 별거 수당으로 1억 10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리버라치는 법정에서 ‘그런 관계’가 아니었음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결국 1986년에 9만 5000달러의 정착금을 토슨에게 지불하고 마무리되었지만 문제는 그깟 돈이 아니었다. 당시 리버라치는 에이즈에 걸려 있었던 것. 1985년 록 허드슨이 세상을 떠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 병은 1987년 리버라치의 목숨도 앗아갔다.
가족 관객층을 대상으로 했기에 평생 자신이 게이임을 숨겨야 했고, 법정에서 “동성애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했으며, 여배우들과 내키지 않는 위장용 데이트를 했던 리버라치. 현재 그와 스콧 토슨의 이야기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의해 준비 중인데, 리버라치 역은 마이클 더글러스가 토슨 역은 맷 데이먼이 맡을 예정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