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자 가보르에 대한 전기 영화를 만든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가브리엘라 타글리아비니는 “영화적 소재로서 완벽한 인물”이라며 “자유로운 정신과 기이한 행동과 사악한 위트를 지닌, 우리 시대의 가장 기억할 만한 인물 중 하나”라고 가보르를 평한다. 그녀는 할리우드 고전 시대의 여걸 중 한 명이었으며 아홉 번 결혼식을 올리면서도 항상 당당했고, 여덟 번의 결별을 겪을 때마다 결혼과 남자와 사랑에 대한 씁쓸한 어록을 만들어내곤 했다.
1917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사리 가보르. 헝가리의 유명 배우였던 사리 페다크에서 온 이름이었다. 15세 때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우연히 연극 무대에 선 그녀는 1936년 ‘미스 헝가리’가 됐고, 24세 되던 1941년에 배우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헝가리 시절 그녀는 스무 살 때 첫 결혼을 한다. 상대는 부르한 아사프 벨게. 터키의 개혁적 지식인이자 정치인이었고 터키 외교부의 언론 담당관으로 당시 헝가리에 머물고 있었다. 가보르보다 18세 연상이었는데 가보르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이혼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가보르는 배우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상대는 무려 서른 살이나 많았던 콘래드 힐튼. 이름 그대로 전 세계적인 힐튼 호텔 체인을 만든 사람으로 패리스 힐튼의 할아버지다.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모두 힐튼의 돈을 원했다”고 말할 정도로 가보르의 결혼은 전략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색한 독재자였고 가보르는 9살 연하의 의붓아들인 니키 힐튼(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함)과 더 친밀하게 지냈고 관계를 맺기도 했다.
힐튼과 이혼 후 그녀는 당대의 스타였으며 <이브의 모든 것>(1950)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조지 샌더스와 1949년 4월 2일에 결혼한다. 가보르가 샌더스에게 매혹된 건 1942년. <달과 6펜스>(1942)를 보러 갔던 가보르는 같이 간 어머니에게 “언젠가는 저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녀는 콘래드 힐튼과 막 결혼한 상태였다. 힐튼과 이혼한 후 1947년 어느 칵테일 파티에서 만난 가보르와 샌더스는 그날 밤 스위트룸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이후 가보르의 끊임없는 구애가 이어졌다. 샌더스는 “난 지금 정신 치료를 받는 중이며 결혼하면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가보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49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했는데 샌더스의 경고는 사실이었다. 그는 정신과 치료에 중독되어 있었고 이후 가보르는 매일처럼 방문하는 의사들 때문에 진저리를 칠 지경이 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첫날밤부터 불행했다. 샌더스의 불찰로 호텔을 예약하지 못해 허름한 모텔에서 초야를 치렀는데 밤새 그들 사이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가보르는 그때를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잃어버린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고, 나는 전남편에게 1년에 25만 달러씩 받았던 이혼 수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LA에서 그들은 종종 따로 지냈다. 샌더스는 할리우드 지역의 아파트에서, 가보르는 벨에어의 맨션에서 지냈다. 여전히 ‘배우 지망생’였던 가보르는 남편에게 역할을 부탁하곤 했지만 항상 거절당했다. 오히려 샌더스의 형이자 배우인 톰 콘웨이가 도움이 되었다. 그는 당시 토크쇼 패널이었는데 가보르를 섭외했고, 그녀는 타고난 입담으로 청중을 휘어잡았다. 그것을 발판으로 그녀는 35세에 배우가 되었고, 존 휴스턴 감독의 <물랑루즈>(1952)에선 주연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샌더스는 냉담했고 결국 가보르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플레이보이인 포르피리오 루비로사와 스캔들을 일으켰다. 당시 존 F. 케네디와도 만났다. 샌더스는 이혼 소송을 걸었고 “가보르와 결혼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다며 심각한 정신적 고통과 혼란을 호소하며 5년 만에 헤어졌다. 하지만 이혼 후 그들은 오히려 막역한 친구가 되었고 <악당의 죽음>(1956)에선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건 1970년에 샌더스가 자 자 가보르의 언니인 마그다 가보르와 결혼한 것. 하지만 마그다와 6주 만에 헤어진 그는 이후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스페인에서 수면제 과용으로 자살하고 만다.
한편 자 자 가보르의 결혼 행진곡은 계속 울렸다. 1962년엔 자본가이며 레이건과 부시 정권에서 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던 허버트 헌터와 네 번째 결혼을 했고, 1966년엔 텍사스의 석유 재벌인 조슈아 S. 코스덴 주니어와 다섯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1975년엔 발명가이자 바비 인형의 디자이너인 잭 라이언과 여섯 번째 결혼을 했고, 1976년엔 자신의 이혼을 담당했던 변호사인 마이클 오하라와 일곱 번째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83년엔 변호사이자 멕시코 출신의 배우인 펠리페 데 알바와 결혼했는데, 전남편과의 혼인 관계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중혼이라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86년. 69세가 된 가보르는 드디어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난다. 독일 출신 왕족이며 26세 연하인 프레데릭 폰 안할트. 그녀가 95세가 된 지금까지 26년 동안 가보르의 곁을 지키고 있다.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이혼한다는 말은, 그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말만큼이나 멍청한 말이다.” “나는 결혼 기념으로 받은 다이아몬드를 돌려줄 만큼 어떤 남자도 미워해 본 적은 없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불과 같아서, 돌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꺼지게 된다.” “난 섹스에 대해 잘 모른다. 난 거의 언제나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혼하기 전까진 그 남자에 대해 진짜로 안다고 하지 마라.”
결혼과 사랑과 남자에 대한 수많은 명언을 남긴 자 자 가보르. 아홉 번 결혼한 인생이었지만 그녀의 삶은 어쩌면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한 긴 여정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말한다. “여자는 사랑을 위해 결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걸 발견할 때까지는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