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 원장이 출연했던 SBS <힐링캠프> 한 장면. 사진제공=SBS |
방송가와 정치권의 첨예한 예능 출연 논쟁의 시작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그가 나온 SBS 예능 토크쇼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힐링캠프)>부터다. 안 원장이 <힐링캠프>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방송 하루 전날인 22일 오후에 알려지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비난부터 꺼냈다. 대선 정국에 접어든 상황에서 특정 정치 성향을 지닌 인물에게만 기회를 준 건 ‘특혜’라는 지적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새누리당의 반발이 거셌다. 새누리당은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까지 열고 “여야 대권후보들이 모두 몇 퍼센트의 지지를 얻느냐 민감한 상황에서 안철수 원장의 <힐링캠프>가 방송돼 지지도가 올라간다면 그것이 올바른 경쟁인지 SBS 측에 묻고 싶다”고 했다. 올해 1월 새누리당의 대권 주자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힐링캠프>에 출연한 것을 두고는 “안철수 원장은 범야권의 인사이기 때문에 야권에서 (문재인 후보까지 합해) 2명이 나왔으니 여권에서도 한 명이 더 나와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새누리당의 이 같은 주장은 최근 <힐링캠프> 출연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김문수 후보를 의식한 발언으로도 풀이되고 있다.
이런 논쟁 속에 23일 밤 11시5분에 방송한 안철수 원장의 <힐링캠프>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화제가 어느 정도인지는 시청률이 먼저 증명했다. 이날 <힐링캠프>는 방송 시작 1년 만에 가장 높은 21.8%(AGB닐슨미디어·수도권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게다가 안 원장은 특히 이 방송이 나가기 며칠 전 자신의 정치관을 담은 책 <안철수의 생각>을 예고 없이 출간해 뜨거운 관심을 모으던 상황이었다.
안철수 원장의 <힐링캠프> 출연은 본인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힐링캠프>는 지난해 말부터 여야 및 무소속을 대표하는 정치인 3명을 차례로 초청하는 기획을 준비해왔다. 박근혜, 문재인 의원은 제작진의 제안을 수락해 올해 초 일주일 간격으로 나란히 출연했지만 제작진이 원했던 또 한 명인 안 원장은 매번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 박근혜 의원도 <힐링캠프>에 출연한 바 있다. 사진제공=SBS |
▲ 문재인 의원도 <힐링캠프>에 출연한 바 있다. 사진제공=SBS |
그러던 안 원장 측은 책 출간이 임박할 즈음 <힐링캠프>에 먼저 연락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진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유력한 대권 주자를 떠나 <힐링캠프>가 만들어진 지난해 7월부터 안철수 원장은 제작진에게 ‘섭외 1순위’로 거론됐던 인물이기 때문.
녹화가 진행된 건 18일 오후 안 원장의 책이 예고 없이 출간된 건 녹화 다음날인 19일이다. 모두 극비리에 진행됐다. 제작진은 안 원장의 녹화 일정이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비밀리에 촬영을 준비했다. 촬영 스태프 전체가 안 원장이 게스트란 사실을 안 건 녹화 당일 아침이었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했다.
파장이 거세지자 <힐링캠프> 제작진은 “앞으로 정치인의 출연은 없다”고 못 박았다. 앞서 김문수 전 지사의 출연을 거절한 사실까지 다시 불거지자 제작진은 이에 대해 “정당별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는 기존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정치인의 예능 프로그램에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지만 출연을 누구보다 원하는 건 정치인 본인이다. 특히 대선정국에 접어든 올해는 어느 때보다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적극적이다.
정세균 민주통합당 의원은 최근 케이블위성채널 tvN의 <SNL코리아2> 생방송에 출연해 “내 이름 세균이 어때서 그러느냐”는 등의 대사를 쏟아내며 대중 친화를 노렸다.
이보다 앞서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낮은 인지도를 스스로 인정하며 ‘자기 비하’ 유머를 펼쳐 보였다. 도도해 보이는 정치인들이 과감하게 망가지는 모습에 대중은 반응할 수밖에 없다. 반전의 재미, 이면을 발견했을 때 찾아오는 카타르시스의 일종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능에서 망가지는 유머를 택하는 건 제작진의 요구가 아니라 정치인 자신의 의지다. 이재오, 정세균 의원 역시 프로그램 제작진에 먼저 출연을 요청했고, 각자 가진 콤플렉스를 유머 소재로 삼아 보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기 예능 프로그램들은 최근 정치인의 출연 요청을 거절하느라 바쁘다. 이른바 ‘윗선’을 타고 출연 압박을 해오는 정치인이 있는 가하면 방청석에만 앉아 있을 테니 카메라로 몇 차례만 비춰달라고 요구하는 정치인도 있다. 이런 요청을 가장 많이 받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는 KBS 2TV <개그콘서트>다. 시청률이 높은 데다 공개 코미디 형식이라 녹화 현장에 모인 수백 명의 방청객들과 한 번에 호흡할 수 있는 장점 덕분이다.
<개그콘서트>의 한 제작관계자는 “정치인 출연은 제작진이나 시청자 모두 민감해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가끔 요청을 받지만 대선과 얽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우려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다”고 밝혔다. KBS의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방청객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정치인이 있던 것으로 안다”며 “대선까지는 특정 정치인이 출연하는 건 어려울 것으로 본다. 자칫 특혜라는 오해를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방송가에서는 “대선과 연관된 정치인이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건 안철수 원장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입장에서 예능 프로그램은 놓치기 어려운 카드다. 실제로 문재인 의원은 <힐링캠프>에 출연한 뒤 10%대였던 지지율이 단숨에 15%대까지 치솟았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