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는 바다 오염으로 생계가 끊기면서 목숨을 걸고 밀수 판에 뛰어들게 된 해녀들이 일생일대의 ‘큰 판’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김혜수는 극 중 성공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밀수에 참여하는 해녀 조춘자 역을 맡았다. 식모로 일하다 도망쳐 나와 부평초처럼 살아가던 춘자는 절친한 친구 진숙(염정아 분)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가족의 정을 느끼게 된다. 진숙과 함께 해녀들의 밀수 판을 이끌어나간 것도 함께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진숙의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늘 안고 사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제가 춘자를 보고 생각한 키워드는 ‘생존’이었어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무력화시켜 항상 존재감 없이 살아가거나, 아니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스스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듯한 제스처를 만들고 살아가죠. 춘자의 경우엔 후자예요. 처음 권 상사(조인성 분)를 만났을 때 너무 무서운데 더 발악하고 큰 소리를 치잖아요. 속으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원래 목소리가 더 크거든요(웃음). 자신의 바닥이 어딘지 알면서도 임기응변으로 살아가려는, 그 임기응변이 어디에 걸려드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인물이에요. 본능과 감각, 직관으로 반응하고 대응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캐릭터죠.”

“대본에서 춘자와 권 상사의 로맨스가 구체적으로 읽히는 게 없어서 좋더라고요. 보통 남배우와 여배우가 붙으면 저희가 경험으로 느끼는 게 있잖아요? (로맨스를) 기대하기 싫은데 기대하게 되고, 그게 그대로 가면 좋으면서도 짜증나는(웃음). ‘왜 (남배우랑 여배우는) 맨날 이래야 해?’ 했는데 춘자와 권 상사 관계는 심플해서 좋았어요. 바닥까지 알면서도 필요해서 서로를 이용하고, 목적은 다르지만 함께 협력하는 비즈니스 관계죠. 다만 (로맨틱한) 감정이 전제되지 않은 관계라 생각하고 연기했는데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뭔가를 목격하면서 저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느껴지는 미묘한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순간도 포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연기했죠.”
위험한 남자들 사이에서도 절대 고개 숙이지 않는 당당하고 뻔뻔한 춘자의 모습과 달리 진숙 앞에서는 솔직하고 진지하면서도 연약한 면모를 보인다. 그런 상반되는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 만큼 김혜수의 춘자는 ‘밀수’에서 캐릭터의 톤을 일정하게 가져가지 않는 유일한 캐릭터로 기능한다. 코믹한 신에서는 과할 만큼 코믹하게 연기하면서도, 진숙과 함께 하는 진지한 신에서는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시퍼렇게 날이 선 진지함을 보여주는 식이다.
“태생적으로 외롭고 불안전한 춘자의 행동이나 말은 진심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면하려는 방식의 하나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춘자가 진짜를 드러내는 건 단 한 사람 앞에서죠. 그때야말로 춘자에겐 정말 거두절미하고 진심만 있는 순간인 거예요. 코믹한 연기나 진지한 연기나 어디서는 힘을 주고, 어디서는 힘을 빼는 게 아니라 그저 춘자의 진심을 드러내려 애썼어요. 삶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장할 때와 진심을 드러낼 때, 그렇게 크게 나눠서 연기했죠.”

“제가 정아 씨와 워낙 많이 이야기한 것이기도 한데, 저와 염정아란 배우 자체가 굉장히 다른 기질을 가진 배우임에도 함께 화합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저는 정아 씨의 연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정말 좋은 배우인 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가가 더욱 빛나는 배우고, 그런 배우를 알아봐주는 관객들이 있다는 것도 너무 기뻐요. 염정아란 배우를 생각했을 때 그 이름이 주는 신뢰가 있잖아요. 저는 그런 배우가 굉장히 귀한 것 같아요. 다른 기질의 배우가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우고 화합하며 만들어낸 시너지가 너무 좋은 배우죠.”
흥행 보증 수표가 붙은 감독과 배우들이 모인 작품인 만큼 ‘밀수’는 올여름 개봉을 앞둔 텐트폴 영화 가운데 가장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전 시사회에서 류승완 감독은 전작 ‘모가디슈’(2021) 이상으로 호평을 받았고, 김혜수는 그가 꾸준히 쌓아올린 흥행작과 인생 캐릭터 목록에 가뿐히 ‘밀수’와 조춘자의 이름을 새겨 넣을 것이란 당연한 분석도 이어졌다. 류승완 감독과 함께한 것에 대해 “보험 들고 영화를 찍은 것 같다”며 웃음을 터뜨린 김혜수는 반면 ‘밀수’의 흥행 질문을 두고 사뭇 진지한 답변을 내놨다.
“정말 정직하게 얘기하자면 작품의 상태나 흥행, 시청률 이런 건 솔직히 잘 몰라요. 저에겐 현장이 다고, 그게 가장 중요해요. 제가 현장에서 느낀 것, 제가 해낸 것, 제가 배운 것, 제가 만난 사람들. 그런 것들요. 운이 좋게 좋은 작품에 합류했고 제 스스로도 성장하는 기회를 얻었다는 데 감사해요. 배우를 오랫동안 할 수 있다는 건 그 배우의 장단점을 대중들이 이미 알고 있음에도 궁금해 하고, 그 배우를 아끼고 기다려준다는 것이잖아요. 그건 축복인 것 같아요. 눈물 날 정도로 너무 감사하죠. 제가 느끼고, 얻은 경험치가 대단하더라도 성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작품을 선택하고 함께 만난 사람들과 해내고 경험한 것이 제겐 전부인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