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8일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영장실 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익치 회장을 만난 사실도, CD를 받은 사실도 없다.”(박지원)
‘대북송금 의혹’에 관한 특별검사팀의 수사과정에서 불거져나온 현대 비자금 1백50억원의 행방을 놓고 박지원 전 문광부 장관과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간에 ‘진실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이 전 회장이 박 전 장관의 요구에 따라 대북사업 준비금 명목으로 1백50억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박 전 장관은 당시 이 전 회장을 만난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
그러나 특검팀은 지난 6월18일 박 전 장관을 1백50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 등으로 긴급체포해 일단 이 전 회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이 변호인을 통해 허위사실을 진술해 명예를 크게 훼손했다며 이 전 회장을 명예훼손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상 횡령 등 혐의로 고소, 두 사람 간의 ‘진실게임’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비자금 1백50억원을 둘러싼 진실게임이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느냐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의 성격과 정치권에 미치는 파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송두환 특검팀은 긴급체포 당시 박지원 전 장관에게 특가법상 뇌물 수수 혐의를 적용했다. 공무원으로서 뇌물에 해당하는 1백50억원 비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박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에 따르면 2000년 4월 박 전 장관은 서울 P호텔 바 토파즈에서 재미사업가 김영완씨를 통해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에게 남북정상회담 준비 비용 명목으로 1백50억원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했고, 같은 달 중순 같은 호텔 바에서 정 회장의 지시를 받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으로부터 현대의 대북사업에 대한 협조 청탁과 함께 양도성예금증서(CD) 1억원권 1백50장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특검팀은 “정 회장과 이 전 회장, 김재수 전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의 진술이 매우 구체적인 데다 모두 일치하는 내용이어서 신빙성이 높다”고 밝혔다. 즉 1백50억원 비자금이 박 전 장관에게 전달된 게 확실하다는 시각.
반면 박 전 장관은 1백50억원을 받은 사실이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그 돈을 전달했다는 이익치 전 회장이 횡령한 것이라며 이 전 회장을 고소했다.
결국 1백50억원의 비자금에 대해 이 전 회장과 박 전 장관 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특검팀에 따르면 박 전 장관에게 전달됐다는 1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 1백50억원은 각각 50억, 50억, 40억, 10억원씩 크게 네 덩어리로 나눠져 사채시장뿐만 아니라 증권사를 통해 돈세탁됐다. 그러나 그 돈이 박 전 장관의 계좌로 흘러들어간 흔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1백50억원은 어디로 사라졌으며 의혹의 ‘진실’은 무엇인가. 특검팀과 현대 관계자의 주장대로 1백50억원이 박 전 장관에게 전달됐다면 돈의 행방은 크게 세 가지로 추정될 수 있다.
첫째, ‘박 전 장관이 정몽헌 회장에게 남북 정상회담 준비금 명목으로 요청했다’는 말 그대로 이 용도에 사용됐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 경우 왜 굳이 복잡하고 정교한 돈 세탁 과정을 거쳤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둘째, CD가 전달된 시점이 2000년 4월 총선을 전후한 시점이란 점에서 김대중 정부 시절 핵심 실세에 의해 정치자금으로 활용됐을 가능성이다. 정교한 돈 세탁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 이런 추측의 근거로 제시된다. 끝으로 박 전 장관이 자신을 위해 1백50억원을 김영완씨에게 맡겼을 가능성이다. 김씨가 박 전 장관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 하나의 근거로 작용한다.
반면 1백50억원과 박 전 장관과는 무관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익치 전 회장의 ‘음모론’과 ‘배달사고설’이 그것.
박 전 장관은 이익치 전 회장이 1백50억원을 횡령하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박 전 장관은 “올해 2월에도 지금과 같은 소문이 있었지만 나를 걱정한 사람들에게 전혀 문제될 게 없다”며 주변 사람들을 위로한 적이 있었다.
박 전 장관은 6월18일 영장 실질심사에서 “나는 이익치씨에 대해 큰 신뢰도 없었다. 돈을 받으면 은밀하게 정 회장한테 받지 이씨에게 받겠느냐”며 혐의를 부인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 회장이 돈세탁을 주도한 김영완씨와 짜고 ‘배달사고’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결국 ‘진실게임’의 실체는 1백50억원 비자금의 최종 귀착점이 밝혀져야 전모가 드러날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이 전 회장 측근 등에 의해 현대상선도 2000년 3월 2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1백50억원 비자금의 성격을 규명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현대상선의 업무자료에 따르면 현대상선은 2000년 3월3일∼14일 외국 거래처에 화물 용선료 명목으로 자금을 송금하는 방법 등으로 총 1백17회에 걸쳐 허위 장부를 만들어 이 돈을 제3자 계좌로 보내는 방법으로 2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업무자료에 대한 설명에서 “비자금 중 일부는 회사와 관련된 일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는 특검팀이 1백50억원의 비자금이 이익치 전 회장과 박지원 전 장관 양측을 모두 잘 아는 사업가 김영완씨가 개입, 치밀한 수법으로 돈세탁 과정을 거친 뒤 정치권 등에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이 전 회장이 돌연 비자금 문제를 제기한 것과 관련, 일각에서는 특검의 압박으로 위기에 몰린 이 전 회장이 박 전 장관의 ‘약점’을 알고 ‘반전’ 카드를 꺼낸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즉 <일요신문>의 보도(제563호)대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박 전 장관은 이 전 회장 등 현대 관계자들이 먼저 북측 관계자를 만난 뒤 접촉하는 수순을 밟은 것으로 밝혀졌다.
박 전 장관도 인정하듯 그가 2000년 3월8일 싱가포르에서 북측의 송호경 조선아태위부위원장을 처음 만난 것은 정몽헌·이익치씨의 지원 덕이 컸다.
북한에 정통한 몇몇 관계자들은 “북한 고위관계자가 싱가포르까지 날아와 대통령의 측근을 만난다는 것은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지원을 사전에 약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DJ가 그 내용을 몰랐을 리 없다”고 말한다.
‘싱가포르 회동’은 이번 특검에서 간과된 정상회담의 ‘대가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북한 아태위측과 핫라인을 갖고 있고, 또 정상회담 막후교섭에도 간여했던 현대측은 DJ정부와 북한 간의 ‘거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익치 전 회장이 이번 ‘진실게임’과는 별도로 박지원 전 장관, 아니 DJ정권의 숨기고픈 약점(김대중 전 대통령 포함)을 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따라서 이 전 회장의 1백50억 비자금 발언에는 진위 여부를 떠나 일종의 ‘경고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 경우 박 전 장관이 DJ정권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로 한다면 ‘진실게임’의 ‘진실’이 그대로 묻혀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